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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17. 2023

꼭 행복한 일만 우리를 변화시키는 건 아니야

시샘이 다정에게

다정아, 오랜만의 편지야. 그간 몇 번이고 너에게 양해를 구하며 편지를 미뤄오다가 한 달도 넘어서야 이 글을 써. 너의 편지를 읽자마자, 네가 편지에서 네가 물은 내 그림책 취향을 설명할 생각이었어. 내 그림책장을 뒤적이며 고민도 했지. 그런데 책을 다 고르기도 전에 여러 일정들이 나를 뒤엎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어. 아마도 퇴사를 하고 난 뒤에? 아니며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뒤 이 정도로 정신없던 건 처음인 것 같아. 한 달간의 큰 폭풍이 지나고 난 뒤, 편지를 써.



아마도 이건 이해를 구하는 긴 변명이야.


이번에 기획한 그림책 프로그램의 모집이 난항이라 꽤나 힘들었었어. 조금 긴 기간이라 가볍게 신청하긴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무료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때 모집으로 고민해 본 적은 많지 않거든. 게다가 모집인원도 뭐 몇십 명 몇백 명도 아니고, 고작 8명인데. '내가 8명도 못 모은다고?!!'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어. 처음엔 모집 링크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니까. 모쪼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썼어. 모집 홍보물도 다시 기획해서 제작하고, 인스타 팔로워가 많은 친구에게도 홍보를 부탁하고, 그림책 관련해서 메일링 서비스를 하시는 선생님께도 홍보요청을 했지. 당연히 내 인스타에도 올리고. 그런데 진짜 놀랍게도 이렇게 해도 8명이 모이질 않는 거야.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썼는데도 안 되니까 나도 단단히 당황했어. 이미 만들었던 홍보물을 다시 하나하나 고민하며 뜯어고치고, 결국에는 인스타에 유료 홍보도 돌려봤어. 무료프로그램을 모집하는데 이렇게 비용을 써본 건 처음인 것 같아. 그런데 진짜 놀라운 건 뭔지 알아?


그랬는데도 모집이 안 됐다는 거야.



꼭 행복한 일만

우리를 변화시키는 건 아니야.


《키오스크》 그림책의 주인공은 자그마한 키오스크에서 먹고, 일하고, 자고 모든 일을 해. 키오스크는 주인공 올가의 인생 그 자체였지. 가끔 키오스크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여행잡지를 읽었어. 석양이 황홀한 먼바다의 사진도 보지.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꿈꾸는 것만으로도 올가는 꽤 만족스러워 보여. 그러던 어느 날 올가의 세상이 뒤집혀. 생각지 못한 순간에 말이야. 그날따라 매일 아침 오던 신문 뭉치가 키오스크에서 조금 멀리 놓여있었고, 못된 아이 두 명이 과자를 훔쳐가려 했어. 하필이면 그때 신문을 챙기려던 올가가 아이들을 신경 쓰다가 키오스크와 함께 넘어져 버려. 넘어진 키오스크와 함께 키오스크에 있던 물건들도 와르르 쏟아지지. 그런데 재미있는 건, 쏟아진 물건들을 챙기던 올가가 키오스크를 들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야! (사실 키오스크를 들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에는 그림책적인 상상력이 가미가 되긴 했어). 늘 키오스크 안에만 가만히 머물러있던 올가는 처음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해. 그리고 그 가벼운 산책은 올가가 생각지 못한 더 큰 모험으로 데려가주지. 올가의 삶의 변화가 꼭 누군가의 다정한 격려, 선의, 혹은 대단한 결심 같은 게 아니라는 게 참 재미있지 않아?


올가처럼 나도 뜻밖에 모집의 어려움을 당하면서 너무 힘들었어. 그런데 일이 순탄하지 않았던 덕분에 모집에 관해서 평소엔 하지 않던 고민들을 더 많이 해봤던 것 같아. 기간이 문제였나, 모집대상이 문제였나, 홍보물이 이해하기 어려웠나, 참가 조건을 너무 까다롭게 세웠나, 프로그램 제목이 별론가, 커리큘럼이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나, 사람들은 그림책에 관심이 없나. 이런 모든 생각을 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되돌아봤지. 

처음에는 모집 인원을 어떻게 모을까만 고민하던 마음들은 점점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내 일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까지 생각해보게 하더라고. 그러면서 깨달았어. 이제 갓 그림책이라는 분야에 발을 내디딘 주제에 어느샌가 내 안에 채워져 있던 오만해진 마음과 느슨해진 긴장감들을 깨달았어. 적당히 해도 무료프로그램이면 잘 채워진다는 생각에 예전보다 덜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던 거지. 아이 엄마를 위한 프로프로그램을 만든다면서 모임시간을 12-3시로 잡아둔 것만 봐도 그래.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과 겹쳐서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참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일을 하는 엄마들도 직장에 있어서 참여할 수 없는 시간을 정해서, 정작 왔으면 했던 사람들이 오지 못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든 거였어. 주위에 몇몇 엄마인 지인들한테 물어보니 다들 시간이 문제였다고 얘기해 주더라고. 물어보기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는 것들을 하지 않았던 거지.


무엇이 문제인지 안 뒤에 나는 다시 홍보물을 만들기 시작했어. 공간 사용의 문제로 사실 가장 중요했던 프로그램 시간을 변경할 수는 없었지만, 그 외에 깨달은 것들을 모두 넣었어. 그리고 다시 인스타 유료 홍보를 돌렸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싶더라고. 이래도 안 되면 지금의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내 삶에 백기를 들었어. 그리고 우연히 물에 풍덩 빠져버린 올가가 물길에 몸을 맡긴 것처럼 나도 힘을 빼고 삶에 흐름에 몸을 맡겼어. 이때 올가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바다에 도착하게 돼. 나는 어디로 도착했을 것 같아?

세 번의 홍보물을 바꾼 뒤에야 부족했던 인원이 채워져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런데 내가 진짜로 도착한 건 ‘프로그램 모집달성’이 아닌 ‘최선의 기쁨’이었어.


생각지 않은 순간들은

생각하지 못한 순간으로 데려가주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모집이 꽤나 힘들긴 했지만, 한 달이나 편지가 늦었던 변명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모집으로 한창 힘들던 때에 나를 힘들게 하던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더 있었어. 대기업과 콜라보로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쇼룸에 나만의 취향을 담은 공간을 만들어 내 취향을 사람들에게 경험시키는 작업을 했어야 했어. 이것도 처음 생각했을 때는 당일 날 가서 말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행사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직접 공간을 꾸며야 하고 프로그램도 평소 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 걸 알고 멘붕이 됐지. 더군다나 내가 생각하기에 행사의 취지와 전혀 맞지 않는 공간을 배정받았거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몇 번씩 공간을 바꾸고 담당자님들과 여러 번 논의를 했어. 이 과정도 나한테는 너무 어려웠어. 내 이름을 달고 만드는 공간과 콘텐츠가 부족하게 보이는 게 싫어서. 일정이 촉박해서 원하는 가구를 빌릴 수도 살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용달을 불러서 내가 가진 커다란 책장을 실었어. 그림책을 거의 80권, 조명에 액자에, 촛대에, 꽃에 작은 소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갔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 같아.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너무 예쁜 거야. 진짜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노원 프로그램의 모집이 잘 마무리되고, 걱정했던 프로젝트도 기대했던 것보다 만족스럽게 끝난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어. 그런데 그와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넉넉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었어. 생소한 행복이라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는데, ‘최선을 다한 기쁨’이라는 걸 알았어. 둘 다 생각지 못한 문제들이 생기고, 잘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정신없이 해서 할 땐 잘 몰랐는데, 나 진짜 열심히 준비했었더라고. 때로는 무식하게 밤도 새우고, 오버해서 가진 것들을 죄다 짐 싸서 옮기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좋았어.

생각해 보면 살면서 ‘최선’이라는 단어를 떳떳하게 말해본 적이 없었어.

늘 잘하고 싶어서 애쓰기는 했지만 

막판에 어딘가 힘이 빠져서 얼렁뚱땅 수습하기에 급급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끝까지 집중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뭔가 대단히 변했다 보다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보통쯤이 아니라 최악밖에 선택지가 없어서 그랬어. 가령 내가 얼렁뚱땅 했다면 끝끝내 프로그램 모집이 0명이 돼서 폐지되거나, 행사를 기갈나게 망하거나 못하는 그런 상황이 일어났겠지. 내가 전혀 의도하거나 바랬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이 문제와 바쁜 시간 속에서 나는 최선이 주는 만족감과 뿌듯함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알았으니까. 예전부터 난 어째서인지 ‘최선을 다한다’는 게 비효율적이고 막연하고 힘들게 느껴졌었어.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굳이 어떤 일을 할 때 많은 품을 들이는 게 싫었던 것 같아. 내 삶에서 극복하지 못한 실패감이 내 삶을 오랫동안 옥죄었었지. 그런데 생각지 않게 이 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이제는 좀 즐거운 기분으로 내가 하는 것들에 더 열심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나한테 주어진 일을 못할까 봐, 결과로 보여주지 못할까 봐, 속 빈 허세처럼 보일까 봐, 말했다가 못하면 쪽팔리거나 무시를 당할까 봐. 이런 이유들로 이루고 싶은 게 없는 것처럼 살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혹은 노력하지 않거나 실망하지 않을 만큼만 애쓰던 나의 느리고 나약하고 조심스럽던 삶이 변하기 시작하는 걸 느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실패도 안 하고, 성취도 없고, 기쁨도 없던 삶에서, 물론 시도하는 만큼 힘들고, 더 많이 낙담해도 그만큼 더 성취하고, 이전에 없던 기쁨을 느끼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어. 뜻밖의 사고와 우연과 불운들이 얽혀서 그토록 바라던 바다 앞에 선 올가처럼.



꿈꾸는 사람만 도착할 수 있는 곳,

꿈꾸는 사람만 볼 수 있는 풍경


언젠가 집에 왔던 분이 가장 인상 깊었던 책으로 《키오스크》책을 고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얘기를 해주셨었어. 주인공이 당도하고 자리를 잡은 노을 진 해변의 모습이 책의 초반에도 나온다고. 주인공이 가고 싶어서 사진으로 간진 하고 키오스크 한편에 붙여놨던 바로 그곳이었거든. 그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어쩌면 이 주인공이 바다까지 온 것은 몇 번의 우연과 불행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본인의 마음에 늘 그 바다가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는 얘기를 하셨어.  그 말이 되게 와닿았어. 주인공이 매일 밤 그 바다를 보면서 꿈꾸지 않았다면, 어느 날 바다에 도착했어도 노을이 지기도 전에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지도 몰라. 그랬다면 살면서 한 번도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바다는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다정아, 나의 꿈꾸는 나의 바다는 ‘열심히 사는 삶’이야.

그리고 ‘이루는 삶’이야. '


매일 적당히 살고 싶다고 말하고 귀찮다고 말했었지만 내심 나는 늘 열정적으로 내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을 바라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어. 이번에 그 맛을 살짝 봤어. 작은 일이었지만. 이 시작이 멈추지 않고 내가 좀 더 큰 꿈을 꾸고, 또 이룰 수 있게 나를 격려했으면 좋겠어. 너도 옆에서 지켜봐 줘.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키오스크≫

아네테 멜레세(글/그림), 김서정(옮긴이), 미래아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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