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이 다정에게
다정이 너의 그림책 취향설명서라니 좋다. 다 아는 것 같아도, 또 이렇게 말로 들으면 새롭고 더 깊게 알 수 있는 것 같아. 네 편지를 읽으면서 문득 너네 집에 있는 그림책장이 생각났어. 가끔 너네 집에 놀러 가면 서재에서 잠을 자잖아. 밤에 너와 대화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면 책장에 있는 네 그림책을 종종 읽었어. 책을 쭉 보다 보면 겹치는 내가 가진 책과 겹치는 게 있어서 너도 이 책 좋아하는구나 반가울 때도 있는데, 내가 본 적 없거나 봤어도 그냥 지나쳤던 그림책도 많이 있더라고. 그럴 때면 우리가 비슷한 것도 많지만, 사람의 취향이라는 건 꽤나 섬세한 영역이라 깊이 들여다보면 이렇게 다르구나 싶어. 겹쳐진 책들 사이로 조금 생경한 그림책을 떠올려보면 너와 나의 취향차이가 보여. 나에게는 없지만 너에겐 있는 책은, 그림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책인 것 같아. 반대로 너는 없지만 나는 가지고 있는 책들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진 것 같아. 나보다 좀 더 심미적인 너의 취향을 느껴. 그래서 언제부턴가 좀 아름다운 책을 보면 네 생각이 나는 것 같아.
내 그림책장엔 어떤 그림책들이 있더라. 나는 어떤 책을 좋아하더라.
나도 내 그림책 취향을 한번 정리해 봐야겠어.
예전엔 그림책을 볼 때 그림체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 나도 너처럼 색연필로 겹겹이 쌓아 따뜻하면서도 섬세한, 평화로운 그림체를 특히 좋아했지. 강한 색이나 선을 쓴 책, 또는 너무 사실적인 그림체를 가진 책은 좋아하지 않았어서 그런 그림책은 펼쳐보지도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점점 그림보다는 이야기에 끌릴 때가 많아졌어. 취미였던 그림책을 업으로 삼으면서부터 다양한 그림책 수업을 듣고, 여러 사람들과 그림책을 읽을 일이 많아졌거든. 그러면서 알게 됐어.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그림책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나였다면 ‘표지 그림부터 내 취향이 아니다’ 선을 긋고 지나갔을 책도 누군가에게는 인생 그림책인 거야. ‘왜 저 책을 좋아할까?’궁금해서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읽다 보면, 왜 그 이유를 알겠더라.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그림체에 대한 취향이 많이 줄어들었어. 그림체 취향만으로 넘기기엔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그림책이 너무 많은 거지.(뭐, 아직 버릇을 못 버려서 아예 그림체의 취향을 넘어섰다고 하진 못하지만, 남들이 다들 좋다는 책은 그림체가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읽어보는 정도는 되었달까!)
처음 나에게 그림체의 편견을 깨 주었던 책은 《태어난 아이》야. 책표지에는 얇고 거친 선으로 한 아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아이의 표정이 뭔가 공허하고 우울해. 나는 그 그림체와 아이의 표정이 싸늘하고 차갑게 느껴져서 보자마자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평소라면 절대 볼 일이 없는 책이었는데, 도서관에서 듣던 수업의 선생님이 그 책을 골라오신 덕에 보게 됐어.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해. ‘태어나기 싫어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첫 문장이 어찌나 저릿하고 통쾌하던지 표지를 넘기자마자 반해버렸어. 종종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아무리 바라도 태어난 이상 ‘태어나지 않은 삶’은 가능하지가 않잖아. 자신의 ‘태어남’에 대한 선택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저 태어난 삶에 책임을 지고 살아갈 뿐. ‘태어나지 않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라는 그림책 속 아이의 삶이 정말 그림책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했어. 표지 때문에 이 이야기를 안 읽었으면 정말 아쉬울 뻔했지 뭐야.
30살의,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한 날
나는 나에게 《태어난 아이》책을 선물했어.
그림책 속 작가의 상상력에 기대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자신의 태어남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게 꽤나 재미있었어. 내가 마치 그 삶을 살아보고, 나도 내 삶을 선택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특히 그 아이가 삶을 선택한 계기가 사소한 게 가장 좋았어. 먹는 것에도 노는 것에도 관심이 없던 아이가 ‘반창고가 붙이고 싶어서, 엄마의 사랑이 받고 싶어서’ 태어나기로 마음을 먹었지. 이 세상을 구한다든지, 대단한 부자가 되거나 큰 업적 남기는 위인이 되기 위한 게 아니었어. 산다는 게 자꾸만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내가 생각보다 삶에 많은 기대와 목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른이 되면 적어도 이 정도는 벌어야 할 것 같고, 적어도 이 정도는 이루어야 할 것 같고, 적어도 이 정도는 의미 있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기준이 있었어. 그리고 그걸 이루지 못한 나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한심하고 작게 느꼈던 거지. ‘이럴 바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아서 이런 고민도 괴로움도 부담도 느끼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 어쩌면 그간 내가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건 사실 현실에 대한 투정이었을지도 모르겠어.
그 당시 나는 30살이었어. 29살 때, 서른 이후의 삶을 고민하다가 퇴사를 결정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몹시 노력하던 때였잖아. 퇴사하기 전 회사를 다닐 때는 ‘보통은 가자’가 내 삶의 모토였어. 대단한 직장이 아니더라도, 그냥 적당히 매일 회사에 가고 적은 돈이어도 꾸준히 벌고,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무난한 하루를 보내는 것. 사실 그때도 조금 무기력증이 와서 삶의 큰 의욕이 없던 때였던 것 같아. 퇴근하고 오면 그냥 집에 퍼져서 유튜브를 보다가 출근하고, 퇴근하고 오면 쉬다가 또 출근하고의 반복였지지. 의욕도 반짝임도 없는 삶에서 회사조차 안 가면 완전한 잉여인간이 되어버릴까 봐,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봐 무서웠어. 그래서 회사라도 가는 게 내가 그나마 애썼던 길이었.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삶이 진짜 즐겁지 않아서 꼭 소가 줄에 매여서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이랄까. 꾸역꾸역 살아가는 느낌이라 산다는 게 늘 버겁고 불편했어.
그러다 그 한계에 부딪쳐서 새로운 전환점을 가진 게 그때였어. 당장 좀 돈이 없고 막연한 미래가 두려워도 무의미하게 다니는 회사생활을 멈추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거지.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삶의 순간순간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능동적인 삶을 선택했던 것. 나는 이때가 나에게 있어서 새롭게 태어난 순간, 스스로 태어나길 선택한 때라고 생각해. 아마 이런 때 만난 그림책이어서 《태어난 아이》가 내 삶에 더 인상 깊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어. 서른 살에 생일 때, 친한 언니가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묻길래 《태어난 아이》그림책을 선물로 달라고 했었어. 서른 살의 나를 이 책으로 기억하고 싶었거든. 그래서인지,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태어난 아이》책을 볼 때마다 서른 살의 나와 그때의 용기가 생각나.
나는 이렇게 그 시기의 나에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
그래서 그 책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는 사연 있는 그림책들을 정말 좋아해.
가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그림책을 주려다가도 멈칫하면서 ‘시샘은 이 책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줘도 될까?’ 고민했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많아.
근데 나는 왜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선물 받은 책은 무조건 다 좋아하거든(!)
그렇게 골라준 책의 내용도 좋겠지만, 그 이전에 선물 받은 책을 보면 상대가 나에게 책을 주기 위해 서점에 가고 책을 고르고 했을 모습들이 상상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려고 고민한 마음 자체로도 이미 벅찬 행복을 느껴져서인 것 같아.
나도 외국에 갈 때마다 그 나라의 그림책을 모으긴 하지만, 사실 나는 생각보다 여행을 간 적이 많지 않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에는 태국, 브라일,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네팔 등 정말 다양한 나라의 그림책들이 많이 있어. 이 중에 상당수는 네가 선물해 준 책이지. 네가 어머니와 함께 간 일본 여행에서 사 온 책도 있고, 결혼하고 갔던 신혼여행에서, 나와 같이 갔던 태국여행에서, 아기 낳을 준비 하기 전에 다녀온 유럽 여행에 사 온 책까지. 네가 삶에서 겪은 수많은 여행지가 나에 그림책으로 기록된 기분이랄까. 그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너와 함께 여행을 다녔던 기분이 들어.
사실 너를 제외하고는 내 친한 친구들은 그림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여행을 다녀와서 그림책을 선물해 줄 때가 많아. 아는 언니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수건조차 하나만 들고 다니면서 짐을 줄이고 줄여서 배낭 하나로 여행했는데, 그때도 여행에 가서 나에게 줄 그림책을 사서 열심히 가지고 다녔다는 얘기를 해줬었어. 친한 친구는 몇 년 전에 스페인으로 이민을 갔는데,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느 날 그림책 한 권을 사진 찍어 보내더라고. ‘이거 있어?’하면서. 스페인 서점에서 나한테 주려고 산 그림책이었어. 얼마 전 한국에 왔을 때 그 책을 받았는데, 친구가 초반에 유학 갔을 때가 생각나더라고. 이 친구가 얼마 전엔 네덜란드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도 또 ‘이거 있어?’ 하고 그림책 사진을 보냈어. 보여줬던 그림책도 나한테 주려고 샀다는데 아직 못 받았지만, 지구 반 바퀴 너머에 내 그림책이 있다는 게 생각날 때마다 설레어. 그림책마다 그 사람에게서 나에게 오기까지의 이야기들이 있지. 그것이 친구들과 나 사이의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는 점도 그림책 선물을 통해 얻었던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아.
사람들이 나한테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물으면 몇 년간 매번 《LES CAILLOUX》라는 책을 말해. 이 책도 선물 받은 책이야. 내가 열었던 첫 번째 그림책 모임에 오셨던 분이 포르투갈 여행을 갔다가 내 생각이 나서 샀다며 선물해 준 책이지. 친구도 아니고 단 한번 본 사람인데, 그런 나를 위해 책을 사 오다니! 그때, 모임에서 내가 여행을 갈 때마다 서점에 가서 여행기념으로 그림책을 사 온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덕분에 자기도 외국에 나갈 때마다 서점에 가게 되었다고 했어. 그런데 그때 갔던 서점에서 재미있는 책을 발견해서 나에게도 주고 싶었었대. 《LES CAILLOUS》는 우리나라 말로 ‘돌멩이들’이라는 뜻이야. 이 책에는 자신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을 마주한 주인공이 나와.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같이 돌을 던지는 대신 돌로 길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거든. 그걸 보면서 이상하게 울컥하고 큰 감동을 받았어. 당시에 관계 안에서 여러 상처를 받으면서 마음이 차갑게 얼어있던 때였거든. 여러 관계와 관계를 하는 내 모습에 실망하면서 그전까지 하던 모든 관계의 애씀과 노력을 멈추고 있었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적어도 상처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 책을 보면서 내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은 ‘사랑하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삶’이 아니라, ‘상처를 받을지라도, 그럼에도 또 사랑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당장 그렇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그 책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내 안에 아직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남아있다는 증거 같아서 내심 안도가 되었어. 그때 선물해 준 분에게도 얘기했었어. “저는 아직 이렇게 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고 싶어요”라고. 그랬더니 그분이 “전 이제 이렇게 못 살겠어요. 저는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하고 말했었어.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지. ‘수많은 책 중에 이 책을 발견하고, 자기 삶에 간직하고, 또 선물하는 사람이 사랑이 없을 리 없지’라고 말이야.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은 내 삶에 나침표 같아.
아직도 살아내고 있진 못하지만, 내가 살아가고 싶은 모습이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하는 삶.
종종 이 책이 한국에도 발간되었나 찾아보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것 같아. 만약 그때 그분이 여행에서 이 책을 선물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아직도 이 책을 만나지 못했겠지. 특별한 인연과 여행을 통해 나에게 찾아온 이 그림책이 내겐 참 소중한 책이 되었어.
막상 좋아서 시작한 일이어도 하다 보면 힘들어서 싫어질 때도 있고, 배우고 싶었던 취미도 막상 해보면 재미없을 때도 있잖아. 믿을 만한 사람이 추천해 준 드라마도 막상 보니까 내 취향이 아니라 꽝이다 싶을 때가 많아. 때로는 좋아하던 작가님이 믿음직스러운 큰 출판사에서 책을 내서 ‘이건 안 봐도 내 스타일이다’하면서 보지도 않고 샀다가 후회할 때도 있어. 이런 걸 보면 매번 100%의 만족감을 주는 일은 없는 것 같아. 내가 고른 책조차 나에게는 꽝일 때가 있는 거지.
그런데 그림책을 선물 받는 일이란 나에게 ‘꽝이 없는 행복’인 것 같아.
한 번도 기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새삼 그림책이 나에게 준 행복이 무엇이었는지 더 선명해진다. 가끔 우울한 날이면, 내 그림책이 잔뜩 쌓여있는 방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책장 속 책들을 바라볼 때가 있어. 내가 산 책에는 내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삶의 터닝포인트에서 《태어난 아이》를 만난 것처럼, 다른 책도 내가 가장 우울했을 때, 새로운 시작을 했을 때,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때, 혼자라고 생각했을 때, 내 주위에 너무 고마운 사람이 많구나를 깨달았을 때. 그 무수한 때의 의미를 담아 한 권, 두 권 모은 책들이거든. 그 책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지나온 삶의 과정이 또 현재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힘을 줘.《LES CAILLOUX》처럼 선물 받은 책들이 보이면, 그 책을 줬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 스치면서 내가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느끼게 돼. 그러다 보면 우울한 마음도 금방 사라지더라고. 이런 게 그림책을 좋아하는 취향이 나에게 주는 큰 기쁨이야.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태어난 아이≫
사노오코(글/그림), 황진희(옮긴이), 거북이북스(출판사)
≪LES CAILLOUX≫
Elea Dos Santos(글/그림), Chandeigne(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