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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17. 2023

나의 그림책 취향 설명서

다정이 시샘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는 너의 말이, 그래서 ‘궁금하다’는 너의 말이, “넌 내가 잘 알아!”라는 말보다도 날 더 깊게 바라봐주는 것처럼 느껴져. 겉으로 비치는 몇 가지 모습, 나와 나눈 짧은 대화, SNS 계정에 편집된 내 모습만 보고도 나를 이런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다 정의하는 말들이 종종 날아들었는데, 14년 동안 나를 꾸준히도 알아온 네가 “널 모르겠어”라고 해주니 감동까지 받아버렸어. 당신에 대해 안다는 말은 때때로 사랑의 말일 수 있지만, 그 무게가 너무 가벼우면 오히려 이해보다는 단적인 정의와 판단으로 느껴질 수 있는 때가 많더라.  


나 역시도 너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많을거야. 그럼에도 궁금해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거, 그게 사랑이다 싶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구절이 있어.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고마워. 

모른다고 느낄 정도로 고민해주고, 

그럼에도 절망보다는 노력을 선택해줘서. 



나의 그림책 취향 설명서 


네가 내 취향을 궁금해하니, 이번 편지에 내 취향을 답장으로 적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좋아하는 게 너무 많으니까 일단 오늘은 그림책 취향에만 제한을 두어야 이 편지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 같아. 


1. 손길이 느껴지는 그림

사실 네가 아는 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거야. 


일단 난 그림책을 볼 때 그림체에 먼저 끌릴 때가 많은 거 같아. 내가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굉장히 큰 부분이 심미적인 충전을 풍성히 해 주기 때문이더라고. 아름다운 그림을 통째로 여러 장 향유할 수 있다는 충만함! 그래서 그림책 장면 중 어떤 페이지가 엽서로 인쇄되어도 손색 없겠다 싶은, 마치 작품 같은 그림으로 채워진 그림책을 좋아하더라. 물론 그림이 전부는 아니기에 그 그림에 배어있는 이야기까지 내게 와 닿는다면, 그런 책을 만났을 때는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이 짜릿하지. 


그림체 취향은 주로 ‘이 그림은 손으로 그렸구나’를 확연히 알 수 있는 그림체를 애정해. 책 속에 멈춰있는 그림인데도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지면, 이건 살아있는 누군가가 직접 그려냈다는 게 실감이 나 더 생생하게 느껴져. 그래서 손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색연필이나 수채화같은 재료로 그린 그림책을 좋아하나봐. 색감이나 텍스쳐는 너무 세지 않게 자연스럽고 잔잔하게 어우러지는 것들이 좋아.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너무 강렬한 것은 때때로 부담스러울 때가 있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네가 선물해 준 ≪연필은 네가 고르는데 10초 밖에 안 걸렸듯, 나도 이 책을 좋아하는 데 5초밖에 안 걸릴 지경이었어. 네가 알고 있는 나의 그 취향, 아직 여전한 중에 무르익고 있나봐. 


취향의 측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 뭐냐고 물으면, 한동안은 계속 이진희 작가님의 ≪도토리 시간이야. 사실 어느 날 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체의 그림책이 ≪도토리 시간이야.”라고 말했을 때, 왠지 나도 그렇다는 말을 바로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던 기억이 있어. 그건 예전 편지에서 얘기했듯, 같은 걸 좋아한다고 했을 때 네 고유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느낄까 싶어 조심스러웠던 거지. 어렸을 때 누가 먼저 “이거 내꺼 찜뽕!”하면 아무도 건드리면 안 되는 암묵적인 질서가 있었잖아. 다 커서도 영향을 받는 건지 몰라. 우리가 같은 걸 좋아하는 게 한 두번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지난 편지에서 다룬 이야기라 이제 조금은 편히 얘기할 수 있게 되네. 네가 찜뽕한 ≪도토리 시간, 나도 참 좋아해. 


≪도토리 시간은 색연필로 여러겹 씌운 정성스러운 손길의 그림들이 가득 담겨있어. 잔잔하면서도 다채로운 색감들이 과하지 않게 영롱해. 어느 힘든 날을 보낸 이가 움츠러들듯 작아진 후 일명 ‘도토리 시간’으로의 여행을 떠나. 일상을 벗어나 그림 속 다람쥐를 만나러 가면, 다람쥐가 자신의 옆에 있는 도토리 집으로 그 사람을 들여보내줘. 작고 귀여운 도토리 집에서 혼자의 시간을 보낸 주인공은 자신만의 속도로 충전을 한 뒤 도토리 집에서 나와 다시 세상을 마주하는 내용이지. 꿈 같은 이야기 같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에 와닿는 이야기였어.  


아이를 낳고 두 달 동안 집에만 박혀 있다가 처음 아이와 떨어져 구미 시내로 나갔던 나들이에서 우연히 ‘그림책 산책'이라는 그림책방을 발견했었어. 그리고 거기서 이 ≪도토리 시간을 만났지. 어떤 역할과 책임을 다 하는 내가 아닌 그냥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때였어. 하지만 그런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사치인가 싶게 여유가 없었고, 아이를 두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 그런데 오랜만에 나선 나들이에서 ≪도토리 시간의 그림을 보며, 엄마 역할에 사로잡힌 내가 아닌 그냥 나로서 그 시간을 만끽했어. 책을 다 읽고 나니 꼭 내게도 어떤 다람쥐가 속삭여주는 것 같더라. “도토리 시간이 필요했죠? 이 책을 읽는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도토리 시간이 되길”하는 다정한 말이 들려왔달까. 


요즘도 버거운 마음에 매몰될 때면 이 책을 펴곤 해. 나만의 ‘도토리 시간’이 내 일상과 역할에도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종종 나만의 도토리 시간을 갖기도 하면서 말이야.  


2. 책의 물성

책의 물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그림책도 좋아해. 이야기도,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매체도 넘쳐나는 세상에서, 꼭 그림책으로만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가 있는 책들. 책이라는 판형과, 책을 들고 책장을 넘기는 행동까지도 그림책을 읽는 행위로 여기는 그런 섬세한 책들 말이야. 그런 책들을 보면 그림책만의 고유한 매력이 듬뿍 느껴지잖아. 예를 들어 바람은 보이지 않아, 네가 이전에 선물 해 줬던 사라지는 것들, 이번에 선물해 준 간다아아!도. 


바람은 보이지 않아에서는 계속 눈을 감고 있는 한 소년(아마도 앞을 볼 수 없는 소년)이 어느 날 ‘바람은 무슨 색일까?’하는 궁금증을 품고 답을 찾아 나서. 그 길에서 만난 여러 동물과 사물과 곤충들은 저마다 자신이 느낀 바람의 색을 답해주지만, 소년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껴. 그러다 마지막에는 소년이 책장을 넘기는 행위를 하는데, 거기서 독자도 소년과 함께 책장을 스르르 넘기면서 책에서 실제로 이는 바람을 느껴. 그렇게 소년은 책장에서 이는 바람으로 자신만의 바람의 색을 만나게 되는 거지. 독자도 같이 말야. ‘바람'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책장을 넘기는 행위'로 독자도 직접 바람을 느끼게 하는 이 책의 설계가 소름 돋도록 좋더라. 


사라지는 것들은 네가 선물해 준 책이었지. 이 책에서는 훤히 비치는 반투명한 트레이싱지를 활용해서 한 장면에서는 있다가 그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장면에서는 사라지는 연출을 했잖아. 예를 들어, 트레이싱 지에 상처자국이 있어서 그 뒷장 아이의 모습과 같이 보면 아이가 무릎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상처자국이 그려진 트레이싱지를 한 장 넘기면 아이 무릎에서 상처가 사라지는 그런 연출. 이 역시 종이 그림책이 가진 매력을 한껏 활용한 것이라 참 좋았어. 


네가 이번에 선물해 준 간다아아!도 책의 물성을 너무도 귀엽게 활용한 책이잖니. 그러니까 시샘아. 네가 이번에 생일 선물해준 책들이 내 취향을 얼마나 정확하게 저격했는지 알겠지? 모른다고 하기엔 너무 잘 알고있네. 


간다아아!는 책을 통째로 뒤집었다가 돌렸다가 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라, 책의 물성을 재치있게 활용했더라. 새가 떨어질 때는 위에서 아래로 읽다가 새가 다시 날아오를 때는 책을 뒤집어 새와 함께 책을 읽는 방향도 아래에서 위로 읽도록 하는 설계가 재밌었어. 이런 장치만으로도 매력적인데, 내용마저 너무 내 삶의 선들과 잇닿아있어서 깊은 여운이 남았어. 새의 첫 비행 도전과, 추락, 그리고 결국 비행하는 여정을 보며 그간 내 도전의 과정이 자연스레 떠올랐지.



그럼에도 넌 날 너무 잘 알아


네가 간다아아!≫ 책 앞에 이런 편지를 남겼어.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용기 낸 순간, 네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던 순간, 그 사이 사이 널 향해 내민 많은 손, 에디터로도 일해보고, 책도 내며 너만의 물고기를 잡은 순간, 널 향해 사람들이 보낸 박수와 격려와 칭찬, 그리고 요즘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며 너와 비슷한 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네가 다시 나눠주는 응원과 도움까지. 몇 년간 네 삶을 가득 채운 경험과 감정을 떠올리기 바라. 그리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길. 누구보다 네가 너를 더욱. 너무 잘했어. 모든 멈춤도, 나아감도, 기다림도, 달라짐도(짝짝짝)”


내 모든 우여곡절의 비행 시간을 네가 지켜봐주고 격려해주고 박수쳐 주었다는 게 실감났어. 


특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길’이라는 너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어. <간다아아!>에도 그 문장이 나오더라. 첫 비행을 마치고 “나는 내가 자랑스러워요!”라고 외치는 작은 새의 말이 내 마음에 꼭 박혔어. 그리고 스스로 되물었지. 나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던 적이 있었나?


나는 최근에 4년 동안 매일 고민하며 끙끙거렸던 내 첫 그림책을 완성해서 공모전에 제출했어. 그림책 작가라는 꿈이 내게는 새가 날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것과 비슷했던 거 같아. 겁은 났지만 한 번 해보고 싶은 것. 그리고 드디어 ‘완성’이라는 경험을 통해 나름의 날아오름을 해낸 거 같아. 하지만 잠시 후련하고 기쁘다가도, 이내 공허하고 불안해졌어. 분명 내게 의미있는 성취이기는 하지만 성공이라 할 수는 없었어. 난 내 그림책 습작을 완성했을뿐 아직 그림책 작가는 아니니까. 이 습작은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실패작으로 끝날 수도 있으니까. 훨훨 날아 저 하늘을 누비는 정도는 되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한 건 고작 간신히 조금 날아올라 다음 나뭇가지에 위에 올라 선 정도 같았달까. 그리고 곧 다시 떨어져내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기분. 


그런데 네가 선물해 준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적어도 나라도 나를 자랑스러워하자.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고 선택해주지 않더라도 말야. 사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내가 오래 동안 붙들고 있던 그림책을 완성했다는 소식으로 내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칭찬하고 축하해줬는데. 너 역시도. 


그리고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얼마나 애를 썼는지. 너무 좋아하지만 정말 자신없는 그림책 작가로의 무모한 도전에 뛰어들었고, 혼자서 어떻게든 완성을 이끌어냈어. 그 시간이 어찌나 무섭고 불안했는지,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해도 되는 건지 의심스러울만큼 고통스러웠는지 내가 알아. 그리고 그 통을 정면돌파하며 나의 속도로 꾸준히 노력해 온 시간들도 내가 알고. 남들이 볼 때 잘 만든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내 책에 부끄러움이 없어. 사실 아직 그렇게까지 자랑스워하지는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하고 싶어. 


시샘아, 그러니까 네 덕분에 일단 나는 오늘만큼은 내가 자랑스러워.
어쩌면 이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마음이었던 것 같아.
나도 몰랐던 필요를 채워주는 널 보면,
어쩌면 그럼에도 넌 날 너무 잘 알아.


P.S. 내 그림책 취향에 대해 한참을 떠들고 나니 너의 그림책 취향도 깊이 듣고 싶네. 이 편지에 대한 답장에는 너의 세밀한 그림책 취향을 들려줘. 나도 너를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을게.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간다아아!≫

코리 R. 테이버(글/그림), 노은정(옮긴이), 오늘책(출판사)

≪도토리 시간≫

이진희(글/그림), 글로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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