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이 다정에게
다정아, 너는 네 기대와 달리 너는 6월 17일에 우리 집에서 자지 못했어. 그날 구원이랑 내가 네 생일 기념으로 호텔을 잡아놨었으니까. 대학생 때는 서로의 생일마다 구원이랑 너와 나, 우리 셋이 함께인 게 당연했는데, 졸업하고는 좀처럼 생일을 챙기는 게 어려웠잖아. 특히 네가 지방에 살게 되면서는 얼굴보기도 더 힘들어졌고. 그런데 이번에 네가 서울 오는 날이 마침 네 생일 근처라 오랜만에 제대로 생일 축하를 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구원이랑 작당을 했지. 같이 호텔을 잡고, 풍선과 케이크를 사서 파티를 꾸몄어. 너한테는 다 비밀로 했지.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나는 네 생일을 떠올리면 미안한 감정이 많이 들어. 네 생일을 자주 잊어서 못 챙겨주거나 당일에 부랴부랴 축하한 적이 많잖아. 심지어는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게 미안해서 ‘축하해’라고 연락조차 못한 날도 있었지. 그날 네 생일이 지나기 전, 네가 먼저 연락해서 ‘왜 생일인데 아무 말이 없냐’고 메시지를 보냈던 게 생각나. 네 성격이 생일날 축하받겠다고 연락하는 스타일도 아닌데 말이야. 나는 그때 너의 연락이 ‘미안해서 내가 자책하고 있을까 봐’ 먼저 부담 가지지 말라고 챙겨준 다정한 마음이란 걸 알아.
나도 참 별나지. 사실 모든 사람한테 다 이런 건 아닌데, 유난히 친한 사람들한테는 잘해주고 싶어 하고, 그런데 막상 잘해주지 못할 때는 과도하게 미안해할 때가 있어. 그래도 네가 그런 나를 늘 ‘어이구~ 김수지’ 웃으며 넘어가준 덕에 나는 조금씩 더 내 주변 사람들을 잘 사랑할 수 있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 유난히 안 외워지던 네 생일을 이제는 똑똑히 외우고, 올해 네 생일 때는 12시가 땡 하자마자 전화를 걸어 축하해 줬지. 사실 이제 다 커서 주위 사람들과 생일을 대단히 챙기지 않지만, 그래도 너한테는 어릴 적 잘 챙겨주지 못한 마음의 빚이 있나 봐. 늦었지만 이제라도 ‘너를 기억해, 소중히 여기고 있어’ 표현하고 싶었어. 때를 맞춰 건 축하 전화를 받는 네 목소리에서 기특함이 느껴졌어.
어때, 잘 키운 친구 하나 열 친구 안 부럽지?
작년에 내가 너한테 “앞으로 생일 때 다른 선물 안 줘도 좋으니까 그림책을 꼭 선물해 줘’라고 말했던 거 기억나? 사실 우리는 여행을 다녀오는 특별한 순간에도, 우연히 멋진 그림책을 만난 일상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며 자주 그림책을 선물하잖아. 언제부턴가는 서로의 생일날에도 자연스럽게 그림책을 늘 주고받았던 것 같아. 그런데도 저 말을 했던 건, 혹여나 한 번이라도 생일날 너한테 그림책을 못 받는 날이 없었으면 좋겠어서 그랬어. 그림책은 누구에게 받아도 기분이 좋지만, 유난히 너에게 매년 받는 생일날의 그림책은 특별하거든. 그 해의 나를 기억해 주는 너의 시선이 담겨있는 게 기분이 좋아서.
작년 생일에 너에게 받은 그림책은《우정그림책》과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해》였어. 네가 한 권은 직접 고르라고 했었는데, 그때 바로 생각난 책이 《우정 그림책》이었어. 전작인 《인생그림책》을 좋아했어서, 《우정그림책》도 소장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왕이면 그 책을 직접 사는 것보다는 가장 친한 친구인 너에게 받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네가 나를 위해 골라서 준 책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해》였어. 책 앞장에 네가 이런 편지를 남겨놨었지.
‘나’에서 ‘타인’으로 너의 균형감이 자라는 걸 보며 나도 함께 커가는 것 같아. 수지가 품어가는 타인들을, 그리고 여전히 소중한 수지를 내가 많이 좋아해! 내가 아닌 수지를 생각하며, 그러는 나를 또 생각하며 이 책을 전한다. 생일 축하해.
2021년, 너의 32번째 생일에 다정이가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해》그림책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궁금해하는 아이들이 나와. 책을 보며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보려 했던 나의 일 년이 생각났어. 아마 작년 연초에 너를 만났을 때 내가 “올해 내 삶의 키워드는 이타심과 진정성이야”라는 얘기를 했었을 거야. 관계 때문에 한동안 힘들고서는 ‘나’에게만 집중하며 이기적으로 살던 삶에서 벗어나, 다시 타인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싶었거든. 아마도 그 말을 너를 기억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또 너는 알았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여전히 나 중심적이고,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회피하던 내 실상을. 그럼에도 네가 준 책을 보며 내가 노력한 순간을 누군가 같이 알아준 것 같아 기뻤어. 네가 아니었다면 ‘결국 잘하지 못했어’라고만 생각했을 텐데, 네 덕분에 그래도 내가 애쓰고 변했던 것이 새록새록 기억나더라. 유독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이고 냉정한 쪽으로 기울어있을 때가 많은데, 나를 보는 너의 시선과 기억 덕분에 나는 나를 좀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네가 주는 그림책이 유난히 더 좋은가 봐.
내가 놓치는 내 삶이 네가 준 그림책을 통해 잊히지 않고 따뜻하게 기억되고 있어.
나도 올해 네 생일 선물로 그림책을 샀어. 너에게 줄 책을 고르는 건 되게 쉬운 일이었어. 국제북페어에 다녀왔었는데, 그때 《연필》이란 책을 발견하고는 단숨에 샀거든. 책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여자아이가 나왔는데, 그 아이가 너랑 똑 닮아서 바로 ‘이거다!’ 싶었어. 그래서 정말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그 책만 주는 게 자꾸 아쉽게 느껴지는 거야. 아마도 예전에도 그림을 그리는 여자아이가 나오는 《강》 그림책을 선물한 적이 있어서였나 봐. 너의 삶은 《강》을 선물했을 때보다 많이 변했는데, 또 똑같은 책을 주는 게 싫었어.
그래서 한 권을 더 선물하기로 하고 싶어 져서 다시 서점에 갔지. 그리고는 또 운명처럼 너에게 딱 맞는 책을 찾았어. 《간다아아!》는 서점에 들어가자마자 처음으로 본 책이자 유일하게 본 책이야. 그 책을 보자마자 딱 네 생각이 나서 다른 책을 들춰보지도 않고 바로 샀거든. 《간다아아!》에서 주인공 새가 생애 첫 비행을 하는데, 시작하자마자 제대로 날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서 물에 풍덩 빠져버려. 하지만 새는 물에서 물고기도 잡고, 결국엔 하늘 위로 멋지게 날아오르지. 한동안 네가 퇴사와 낯선 도시로의 이주, 육아 등의 새로운 국면들을 맞이하며 ‘일’에 있어서는 실패하거나 뒤쳐지고 있다고 느끼며 고민을 많이 했었잖아. 그런데 올해에 네가 결국에 책출간도 하고, 글 쓰는 프로그램의 강사가 되어 너와 같은 이주여성들을 격려하는 일도 하고, 오랫동안 잡고 있던 그림책을 완성하기도 하는 게 생각나면서 너의 삶에 굉장히 의미 있는 전환기를 보내고 있으니까. 요즘의 네 삶이 《간다아아!》책에서 새가 물고기를 잡고 탁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너를 만나러 가는 날 이렇게 고른 《연필》과 《간다아아!》 두 책을 챙겨서 집을 나섰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야. 또, 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거야. 왜 자꾸 책을 잘 못 고른 기분이 드는 걸까, 이상했어. 나름 고른 이유도 있고, 분명 네가 좋아할 거라는 걸 아는데도 그 기분이 사라지질 않았어. 그림책을 고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우리가 호텔에서 만났던 날, 그 이유를 깨달았어. 사실 이번에 호텔 고르는 것도 되게 어려웠거든. 오랜만에 네 생일 기념으로 같이 만나는 거니까 오로지 네가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그래서 구원이랑 같이 네가 좋아할 공간과 음식을 찾고, 내가 좋아할 만한 전시나 체험공간이 있다면 가고 싶어서 열심히 고민을 했었어. 그런데 되게 어렵더라고. 네가 어떤 스타일의 공간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활동을 하는 걸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분명 옛날엔 네가 좋아했던 것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의 네가 좋아하는 건 하나도 모르겠더라. 나만큼 너의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는데 당혹스러웠지. 결국엔 서프라이즈고 뭐고, 호텔도 네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라며 여러 개의 링크를 보냈잖아. 그게 나의 최선이었어.
왜 내가 너의 취향에 대해서 이렇게 모르는 걸까 고민해 봤어. 아마도 연락할 때 나누던 대화가 거의 진지한 얘기 뿐여서였던 것 같아.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이나 삶에서 의미 있게 깨달았던 것, 각자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얘기하다 보면 막상 취향에 대해 얘기할 새가 없었잖아. 아니다, 사실 없었다기보다 취향에 대해 굳이 얘기하는 게 우리 사이에서 낯선 일이었던 것도 같아.
왜냐하면 우리한테 서로의 취향은
얘기해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곁에 있으면서 깨닫는 거였으니까.
서로가 시절마다 즐겨 입던 옷, 같이 간 서점에서 고른 책, 꿈꾸던 여행지, 무언가를 바라볼 때의 눈빛, 즐거워하는 표정, 가끔씩의 뜬금없는 선택들. 이런 걸 보면 때마다 서로의 변화와 취향을 알아챌 수 있었어. 쉬는 것도 노는 것도 함께 하던 시절에는. 문득, 애써서 묻거나 찾지 않아도 서로를 깊이 알 수 있던 시절이 과거라는 것이 실감 났어. 그때는 그랬고, 그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 같을 수 없다는 것도. 우리가 모든 것을 공유하던 시절이 이미 한참 전에 지나버린 거지.
이제와 내가 너의 그림책을 고르며 마지막까지 아쉬웠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너의 취향을 모르기 때문이었어. 네가 어떤 그림체를 좋아하는지, 어떤 작가님을 좋아하는지, 요즘 새롭게 관심이 가거나,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나는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는, 때로는 너도 인식하지 못한 너의 취향을 찾아서 너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나 봐. 예전에의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한 때, 소중한 사람들의 변화와 취향을 잘 알아채는 게 나의 장점이라 생각하던 때도 있었어. 그런데 이제와 생각하니 그건 나의 장점이 아니라 그 시기의 특권이었던 것 같아. 우리가 쉽게 아름다울 수 있던 시기는 지났고, 이제는 그때 같기 위해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단 생각을 했지. 그래서 이제 종종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요즘엔 뭘 좋아해, 요즘엔 어떤 것에 관심이 있어? 요즘 새롭게 좋아진 게 있어?" 이렇게.
너에게 그림책을 주던 날,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 그래서 많이 아쉬웠어."라고 말했지. 그때 네가 "그럴 땐 네가 좋아하는 걸 주면 돼"하고 말했잖아. 좋은 생각이다 싶어. 서로의 생일마다 각자의 지금의 취향을 알려주는 것도 좋은 선물일 수 있겠다 싶어서. 이번 내 생일 때는 너의 취향이 가득 담은 그림책을 선물해 줘. 요즘의 너를 깊이 알 수 있는 게 나에게는 정말 멋진 선물이 될 것 같아.
비록 아쉽지 않을 만한 그림책을 찾아서 선물해주진 못했지만, 기억해 줘.
나는 늘 매년, 매 순간 새롭게 변하는 너를 궁금해 한다는 걸.
나도, 내가 아닌 너를 — 생각해.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우정 그림책≫
하이케 팔러(글), 발레리오 비달리(그림), 김서정(옮긴이), 사계절(출판사)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해≫
윌바 칼손(글), 사라 룬드베리(그림), 이유진(옮긴이), 위고(출판사)
≪간다아아!≫
코리 R. 테이버(글/그림), 노은정(옮긴이), 오늘책(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