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 Oct 17. 2023

청춘의 유효기간

다정이 시샘에게 

시샘아, 오늘은 5월 31일이야. 올해도 어김없이 빠르게 지나가네. 다이어리를 뒤져보니 우리가 가장 최근에 만난 게 올해 1월이더라. 그때 창밖의 풍경은 고요한 회갈빛이었는데, 어느덧 활기찬 초록으로 가득 찼어. 청청한 색들의 향연 앞에서 절로 ‘청춘'이 떠오르는 계절이야. 


이 계절 탓일까? 나는 요즘 ‘청춘'이라는 단어가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떠올라. 어느 애 엄마의 주책일 수도, 지나친 감성에 빠져있는 건지도 몰라. 최근에 본 드라마 <스물 하나, 스물 다섯>의 여파일 수도 있어. 청춘의 시절이 아련히 담겨있는 그 드라마를 보며 나에게도 있었던 그 청청한 시절이 떠올랐어. 너도 이 드라마 봤지? 


서로에게 찬란한 첫사랑이었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여전히 서로를 아끼지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끝에 결국 이별을 택하는 장면을 남편과 같이 보다가 둘 다 광광 울었어. 훌쩍이고 있는 남편(원래도 잘 우는 편)에게, “뭐 얼마나 대단한 첫사랑을 한 거냐?”하고 물었지. 남편이 어버버하며 당황하는 게 느껴졌으나 모른척 해 주기로 했어. 



오 나의 청춘


‘청춘' 을 이야기할 때, 첫 사랑이 빠지면 섭하지. 그 풋사랑을 떠올릴 때면 가장 순수하면서도 지독히 서툴렀던 나의 첫 마음이 인상깊어. 그나저나 나의 첫 사랑을 네가 알고, 너의 첫 사랑을 내가 아는 것도 새삼 인상깊네. 서로가 서로의 청춘 한 자락의 증인이 되는 기분. 너나 나나 그 때의 우리는 계산 없이 좋아하는 마음 자체에 집중하는 순수함이 있었다 싶어. 그 순수함이 내가 생각하는 청춘의 한 조각이기도 하고.


첫사랑과의 이별이 그랬듯, 온갖 노력을 다 짜내도 결국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받아들이던 순간들이 청춘의 장면으로 남아 영화처럼 지나가기도 하네. 대학 시절 매일 3~4시간씩 자면서 6개월 동안 생리가 멈출 정도로 치열하게 만든 첫 단편 영화가 마지막 편집 출력 오류로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며 대망신의 결과물이 되었을 때, 최선을 다해 아꼈던 친구가 내가 이해할 수는 없는 이유로 날 가차없이 떠났을 때, 한창 일에 빠져 매진할 때 오른쪽 얼굴이 마비되어 결국 퇴사를 결정해야 했을 때 등등. 그렇게 나로서는 사력을 다했으나 어쩔 도리 없이 실패했던 순간들이 사실 내 청춘을 지탱하는 중요한 조각이더라. 그 순간들을 통해 난 분명히 성장했지. 


그러니까 내가 <스물 하나, 스물 다섯>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이별 장면에서 그렇게 눈물이 났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 같아. 아무리 좋아해도, 최선을 다해봐도, 결국은 속절없이 무너졌던 내 청춘의 장면들이 수도 없이 떠올라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좋아하진 않았는데, 틀린 말이라고 우길 수도 없긴 해. 지난하게 아파가며 꾸역꾸역 성장했던 청춘이었지. 


하지만 청춘이 그리운 건 그만큼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이 많기 때문일 거야. 내 마지막 사랑인 남편을 만났고, 데이트 비용은 없지만 자주 만나고 싶어 도시락을 싸서 만나던 시절도, 아무 것도 없이 결혼을 해서 바퀴벌레 나오는 이태원 달동네에 살아도 낭만적이라 느꼈던 때도 다 청춘이었지. 둘 다 퇴사를 하고 그동안 모은 돈을 탕진하며 3개월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태국을 누빈 것도 잃을 게 많지 않아 용감했던 청춘이었고. 


너와 동아리 친구들과 갑자기 지하철에서 플래시몹을 하자며 지하철역 바닥에 앉아 밤새 회의한 날, 너와 구원이와 학교 광장 한 복판에서 박스로 텐트를 만들고 별 보고 영화 보다 야외 취침을 한 날, 학교 축제 중에 너와 다른 친구들과 건물 지붕 위에 사다리 타고 올라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주제의 이야기를 하며 배 찢어지도록 웃었던 밤, 밤을 새며 연극을 연습했던 날들, 또 너와 구원이와 함께했던 내일로 기차여행, 너와 구원이와 폐건물에서 했던 방탈출 게임, 그 외에도 내 청춘의 많은 순간에 너희와 함께 이상하고 귀여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지. 내 청춘은 네 덕분에 더욱 다채롭고 반짝거리는 거 같아. 


써놓고 보니 내가 아름답게 느끼는 청춘에는 ‘자유'가 있다는 게 선명해지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가진 게 무엇이든, 

내 역할이 무엇이든,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일단 하는 그 자유. 


타인의 시선과 누군가의 허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누빈 날들이었어. 


내가 너에게 선물해 준 ≪허락없는 외출≫ 기억나? 온통 초록이 가득한 숲으로 채워진 이 책의 그림들을 보면서도 청춘을 떠올렸어. 무엇보다 청춘의 순간은 이 책의 제목처럼 온갖 종류의 허락없는 외출에서 온다고 느꼈거든. 


이 책의 주인공은 누군가의 허락도 없이 자신이 열고 싶은 문을 열고 낯선 길로 나선 한 소녀야. 불안과 설렘 속에서 새로운 세상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고, 홀로 한없이 고독하기도 하고, 떠돌기도하고 머물기도 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장면들이 가득해. 텍스트가 없는 그림책이라 그림들만 보며 내가 원하는 해석을 곁들이기 좋았어서 그런지, 난 이 책에서 내가 청춘의 시절을 통과하며 겪은 감정들을 비슷하게 느꼈던 거 같아. 계산없는 순수함, 쓰라린 성장, 소중한 만남, 가볍게 누비는 자유같은 것 말야. 그래서 이 책의 책장을 넘기는 내내 덩달아 나도 자유로운 기분이 들다가, 괜히 아련하기도 하더라.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어. 나는 왜 이토록 청춘이라는 단어에 연연하고 있을까. 청춘의 유효기간은 도대체 언제까지일까. 



청춘의 유효기간


스무살에 만난 우리가 서른 셋이 되었지. 서른 셋. 많은 나이가 아니란 걸 아는데 나는 왠지 자꾸 ‘청춘'을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게 돼. 마음만 청춘이면 영원히 청춘이라는 말도 들어는 봤지만,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라는 청바지 건배사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청춘으로 여기는게 막 자연스럽지가 않아. 분명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른 셋이라는 나이가 너무도 아기같이 느껴질 때가 반드시 오겠지. 그걸 아는데도 서른 셋이라는 나이가 가볍지만은 않네. 


사전에는 ‘청춘'이라는 말이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이래. 이렇게 단호하게 ‘이십 대'로 선을 그어 놓다니 조금 분하네. 어쨌든 그러니까 ‘청춘'이라는 단어가 목에 딱 걸려서, 삼키긴 삼키는데 조금은 애써야 삼킬 수 있게 되나봐. 정말 청춘은 자신이 청춘인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조차도 없다는 말도 있잖아. 내가 이렇게 ‘청춘…청춘!’ 거리며 감상에 젖어있는 건 나의 청춘이 지나갔다는 반증 아닐까 싶어 덜컥 쓰라리기도 해.


너는 어떠려나. 너는 스스로를 청춘으로 느끼고 있으려나. 사실 너를 보면 그냥 막 청춘 그 자체지. 반짝이는 도시 서울에 살며 아늑하고 개성있게 가꾼 너만의 집에서,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머물고 싶을 때 머무는 자유가 너에겐 있으니 그것 참 청춘이지.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탐색하며 도전하고 성취해나가는 열정의 여정도 청춘답게 느껴져. 지금까지 써 왔고 앞으로도 써 나갈 너의 로맨스 서사도 청춘의 맛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고. 이렇게 생각하니 청춘의 유효기간은 나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 


나이가 청춘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면, 내 상황이 한 몫 한 걸까. 확실히 허락 없는 외출을 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살고 있긴 하지. ‘청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 것도내가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거대한 변화를 겪으며 마주한 단상인 것 같아. 아직 아이가 어리다보니 내게 자유가 별로 없거든.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거대한 권위의 대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 내가 자유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면 상황과 주변의 허락과 협조가 필요해. 이전처럼 어딘가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도,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쉴 수 있는 자유도 없지. 해야만 하는 일이 가득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시간도 많지 않고, 새로운 도전들 앞에서는 아직 내 손길이 많이 필요한 어린 나의 아이를 떠올리며 이전보다 더 많이 망설이게 돼. 이전에는 어떤 경험을 하든 나 혼자 책임지면 됐지만, 이제는 내 선택에 영향 받는 사람이 많아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워. 이전과 달리 묵직해진 내 움직임 때문에 내 청춘이 져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 아이를 낳고는 한동안 ‘허락없는 외출’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를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청춘'이라는 감각은 되게 주관적인 것 같더라. 주변에 아이를 낳은 친구들에게 ‘스스로를 청춘으로 느끼고 있어?’라는 질문을 했는데, 다들 청춘이라고 느낀다고 하데? 거기서 조금 희망을 느끼기도 했어. 상황의 문제일 줄 알았던 청춘과의 이별은 어쩌면 마음의 문제일 수 있는거지. 이제 내 마음만 고쳐 먹으면 내 청춘도 조금 더 길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 거야. 


사실 어떤 시기가 끝나고 지나가는 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 계절에도 움트던 싹이 푸르러지고, 

무르익다가 지는 그 모든 과정이 있듯이 인간의 삶에도 계절이 있을텐데. 


그 계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서도, 

솔직한 마음은 최선을 다해 

나의 초록 청춘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자꾸 들어. 



냅다 크롭티를 입은 날 


어제 난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허연 배가 슬쩍 보이는 크롭티를 입었어. 나로서는 대단한 도전이었어. 오래 전부터 입고는 싶어서 충동구매를 했었어. 다만 이 좁은 동네 살면서 애 엄마가 저런 옷을 입는다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자꾸 하는 바람에 꺼내 입을 용기를 못했어. 말 그대로 상상이야.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임신과 출산을 겪고 찐 뱃살이 아직 다 빠지진 않았지만,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냅다 크롭티를 입었어. 뱃가죽에 바깥 바람이 스치니 낯선 해방감이 일더라. 


임신했을 때 집에 있는 미니스커트를 다 버렸던 게 후회가 됐어. 이제 아이를 낳으면 이런 옷은 입으면 안 되는 옷 같았거든. 나에게 뭐라고 한 사람 하나 없는데 어떤 정체불명의 기준에 스스로를 가뒀어. 입고싶은 것을 입을 자유를 스스로 버린 거지. 누가 주입한 지 모르겠는 ‘아이를 낳은 사람’에 대한 정체불명의 엄격한 기준이 나를 옥죄고 있었던 것 같아. 


그 기준에 일일이 허락을 받으며,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했던 것 같고. 

그런데 다시 크롭탑을 입는 순간 

잃었던 자유를 되찾은 것 같더라. 

나만의 ‘허락없는 외출’을 오랜만에 감행한 격이야. 


그런데 어느덧 아이를 하원하러 갈 시간이 되었고, 나는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옷을 갈아입고 어린이집에 갈 시간이 없었어. 어쩔 수 없이 크롭티 차림으로 가야했지.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어. 입고있던 바지를 있는 힘껏 올리고, 짧은 상의를 최대한 아래로 당겨 내린 뒤, 혹시라도 내 허연 배가 보일까 두 팔로 엉거주춤 배를 가리고 아기 하원을 하러 갔어.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아이를 데리고 나왔지. 그러는 내내 선생님과 다른 부모님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은지, 어떻게 생각할지 잔뜩 신경이 쓰이더라. 


그런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깨달았어. 내가 스스로 내 청춘의 셔터를 일찍 닫아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을 느낀 건 내 상상으로 과장한 ‘타인의 기준과 시선’ 때문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형체도 없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아니 형체가 있더라도 그렇게 중요하진 않을 시선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꽁꽁 묶어둔 것 같아. 그 시선에게 일일이 허락받는 기분으로 살았던 거지. 



나만의 허락없는 외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나는 확실히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게 명확한 사실이야. 내 몸 하나만 생각하지 못하고 늘 세 명의 몸을 생각해야 해. 홀가분한 시절은 지나갔어. 좋아하는 것이 많지만 가족이 우선순위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밀리기도 해. 그렇게 포기를 반복해왔지. 그 시간이 준 성장과 의미도 분명히 있어. 


때때로 포기하는 것에는 용기와 사랑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 포기의 동기가 ‘타인의 시선’일 때는 

그 포기를 망설일 필요가 있더라. 


포기하는 경험에 익숙해져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마저도 포기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완연한 청춘 시절에 공기처럼 누리던 온전한 자유는 지금 내게 없지만, 나를 필요 이상으로 짓누르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는 자유해지고 싶어. 그런 다부진 생각을 크롭티를 입고 했어. 입길 잘했지? 아직 보낼 준비가 안 된 나의 청춘과 사이좋게 지내려면 포기하는 감각만큼이나 포기하지 않는 감각도 유지해야한다고 느껴.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허락없는 외출에는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봐야겠어. 행복한 고민이 될듯 해. 이번엔 내 허락없는 외출이 비록 하찮은 크롭티였으나, 다음 허락없는 외출은 널 만나러 가는 거야. 나 6월 17일에는 오랜만에 상경해 너희 집에 놀러 갈 거야!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허락 없는 외출

휘리(글/그림), 오후의소묘(출판사)


이전 12화 네가 날 부러워할 줄은 몰랐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