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이 다정에게
너를 오래 알아도 알지 못하는 마음이 많은 것 같아.
나는 정말로 내가 했던 생각을 네가 모를 줄 알았거든. ‘잘했다’ 말해주는 마음 안에 있던 두려움도 몰랐어. 그래도 네가 해주는 말속에 담긴 진심만큼은 한 번도 빠짐없이 잘 알고 있어. 네가 용기 내서 해줄 새로운 말들도 기대하지만, 네가 해주는 강물 같은 말로도 이미 나에게 충분했단 것을 꼭 기억해 줘.
네 편지에서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책 이야기를 보고, 문득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 SNS에서 우연히 이 책을 봤는데 책제목과 표지의 그림에 한눈에 반해서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주문했어. 인기 있는 책이라고 읽어보지도 않고 샀다가 아쉬웠던 적이 종종 있어서 ‘직접 보지 않은 책은 절대 사지 말자’ 마음먹었었는데, 그 결심이 깨질 만큼 강렬한 끌림을 느낀 책이었지. 어떤 책일지 너무 궁금해서 책이 배송 온 날, 현관에서 상자를 뜯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읽었어. 다 읽고 책을 폭 안 앗지. 눈물이 핑- 돌더라고. 네가 받았던 위로처럼 나도 나에게 필요했던 위로를 책 속에서 발견했거든.
책 속 주인공의 아빠는 말을 잘하지 못해 속상해하는 아이를 강물 앞으로 데려가잖아. 왜 못했냐고 다그치거나 말을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 “너는 강물처럼 말하는 아이야”라는 말이 ‘강물이 부딪히고 흩어지고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아름답게 일렁이는 모든 모습’이 다 강물다운 것처럼, 아이가 어떤 모습을 가졌든 그 자체로 너답고 괜찮은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 나도 아이처럼 어린 시절에 저런 말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에게는 강물처럼 말해주는 사람이 너도 있고, 가족들, 친구들 많이 있지만, 그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내 삶이 조금 덜 외로웠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었지.
어렸을 때 아빠가 종종 나에게 “넌 너무 복잡해.”’라는 말을 했었어. 너무 생각이 많다고. 혼낸 건 아닌데, 나는 그게 꼭 내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어. 사실 아빠 때문이라기보다, 아빠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나는 내 성격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생각도 많고, 복잡하고, 예민하고. 지금 생각하면 다들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왜 그렇게 문제였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내 성격 때문에 누군가를 힘들게 한 적이 있나? 혹은 미움을 받은 적이 있나? 생각해 보면 그런 적이 없었거든. 유일하게 나로 인해 힘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 뿐이었어. 복잡하고 예민한 내 성격이 나를 너무 피곤하게 해서 사람들도 이런 나를 알게 되면 내가 나를 미워하듯 사람들도 나를 미워할 거라 생각했나 봐. 제대로 미움받은 적도 없으면서 미움받을까 봐 숨어버린 걸 보면 나는 예민할 뿐 아니라 겁쟁이기도 했던 게 분명해.
내가 좋아하는 《작은 꽃》그림책을 보면 혼자서 성벽을 쌓는 그 안에서만 사는 파란 아이가 나와. 자신과 세상 사이에 커다란 가림막을 세우는 거지. 그런데 재미있는 게, 파란 아이가 쌓은 성벽을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창문이 나있거든. 그걸 보면서 이 아이는 성벽에 몸을 숨기면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싶구나’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리고 이 아이의 모습이 꼭 어렸을 때의 나와 닮았다고 느꼈어.
본지 얼마 안 된 사람들도 나한테 “MBTI에서 E죠?” 얘기할 때가 많아. 다른 건 잘 몰라도 E인건 확실할 것 같다나! 어렸을 때부터 겉으로는 잘 웃고 활발해서 아무도 내가 외로워하거나 겁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내가 부지런히 벽을 쌓고 노력한 덕분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한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려고 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내 성벽 안의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늘 찾았던 것 같아. 어쩐지 성 안의 마음이 늘 공허하고 외로웠거든. 그래서 그림책 속 파란 아이가 성벽을 쌓으면서도 벽 중간중간 창문을 만든 마음을 무엇 때문인지 이해가 돼.
중학생 때 당시 베스트셀러였던《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어.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책 속 주인공이 어릴 적 은사님이던 모리가 병상에 있자 찾아가서 나눈 대화가 담긴 책이었어. 일상에 지쳐있던 주인공이 은사님 앞에서 만큼은 솔직하고 편안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던 게 기억에 남아. 그 책을 보면서 나도 모리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그때부터였지. 내 소원이 인생에서 ‘모리’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이 된 건. 그런데 내 삶에는 좀처럼 모리가 나타나지 않는 거야. 함께 놀면 좋은 친구들이 많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은 친구가 없었어. (이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얘기했으면 잘 들어줬을 수도 있는데, 내가 지레 ‘친구들은 내 얘기를 싫어할 거야’ 판단했던 것 같기도 해).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뀌고, 전학을 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도 ‘모리’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까, 대학교에 올 때쯤엔 그렇게 생각했어. ‘아, 책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우정은, 현실에는 없는 거구나!’하고 말이야. 그런데 신기하게 그 기대를 딱 내려놨을 때 너를 만났어.
너를 처음 본 건, 연극 동아리 면접 때였어. 고등학생 때 축제에 대본을 써서 연극을 올렸는데 그 일이 꽤 즐거웠어. 그래서 대학교에 가자마자 연극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어 지원서를 냈었지. 면접을 보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때 한 여자애 유난히 인상 깊었어. 노란 탈색머리에, 속눈썹이 정말 길고, 짧은 치마에 뾰족한 금색 하이힐을 신고 온 거야. 그게 바로 너였지. 지금의 널 떠올리면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야. 친해지고 나서 그때 너의 모습이 너무 모범생적으로 살아온 삶의 반항심리로 꾸몄던 모습이라는 알게 됐었지. 첫 모습은 그렇게 새침데기였는데, 동아리 MT에서 다시 만난 너는 핑크색 후드티를 입고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첫인상을 보고 느꼈던 경계심(?)이 사르르 녹아버렸지. 그렇게 동아리 친구로 만난 너와 ‘진짜 친구’가 됐다고 느낀 건, 기숙사에서 새벽까지 길게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밤이었어.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잊었지만,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서 ‘드디어 모리를 만났어!’하고 설레었던 마음은 기억해. 너와는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던 거지.
도대체 그날 우리는 얼마나 특별한 대화를 나눴길래, 나는 너를 오랫동안 찾았던 모리라 생각했던 걸까. 편지를 쓰며 생각나지 않는 그날의 대화를 열심히 유추해 봤지만,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서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다만 너와 함께 보내며 네가 나를 대한 모습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문득 그날을 떠올려보자니, 내 말에 정성껏 귀 기울여주었을 너의 얼굴이 상상 돼. 어쩌면 그날, 나는 어떤 대화가 아니라, 그 표정에 안도하고 그간 닫아왔던 벽을 허물었던 건 아니었을까.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친구들이 너무 좋아서, 같이 친해지려고 여러 가지를 했던 것 같아. 우리끼리 마니토도 여러 번 했고, MT도 가고, 여행도 가고. 그 모든 걸 할 때마다 ‘내가 너무 오버하나?’ 걱정이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마다 너는 “네가 이런 거 해줘서 너무 좋아”라며 너무 즐겁게 같이 놀아주는 거야. 너무 “내가 너무 나대는 걸까? 애들은 하기 싫은데 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고민을 하면, 그땐 호불호가 심해서, 싫은 건 싫다고 얘기했는데, 말하고서도 ‘너무 예민하고 부정적인 사람으로 보이면 어떻게 하지?’ 고민할 때, 너는 그런 나를 보며 “해야 할 말은 하는 모습이 멋있어”라고 해주고,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내 필명을 ‘시샘’으로 지었을 때, 왜 시샘이냐는 말에, 나는 시샘이 많은 사람이야. 나는 주위 사람들 되게 많이 질투해. 너도 질투해.라고 얘기했을 때, 말해놓고도 내가 너무 찌질 해 보이면 어떻게 하지’ 할 때, 너는 나에게 “나는 내 안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게 어려운데, 너는 참 솔직한 사람인 것 같아”라고 말해줬잖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나의 진심, 혹은 내 연약함의 맞은편에 있던 용기와 순수함들.
너는 그 시절 성벽 안의 있는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한 사람이었어.
덕분에 나는 네 옆에서는 조금 편안하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다듬어지지 못한 내 겉모습을 조금 보여주더라도 너는 오해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과정으로 봐줬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내 깊은 진심들도 알아줬으니까. 네 앞에서 나는 좀 생각 많고 복잡하고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솔직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었어.
《작은 꽃》에서 성벽 주위를 돌던 분홍아이가 파란 아이에게 꽃을 주는데 그 꽃이 계기가 되어 파란 아이가 처음으로 성벽 밖으로 나와. 둘은 함께 꽃이 핀 들판으로 나가. 누군가 꺾어준 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피어있는 살아있는 꽃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지. 파란 아이에게 성벽 안에만 있을 때는 경험할 수 없던 새로운 순간들이 생겨나는 거지.
대학생 때, 너와 같이 재미있는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아. 깜깜한 밤 학교건물 지붕에 올라가서 같이 별을 봤던 순간이 기억나.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박스집을 만들어서 밤을 새웠던 날도. 불 꺼진 작은 무대 위에서 우리끼리 각자 자신의 삶을 표현한 모노드라마를 했던 것도 재미있었지. 아마, 지금 우리한테 하라고 하라고 하면 오글거린다고 못할 것 같은데 그땐 어떻게 그렇게 다 했을까. 그리고 여름방학 때 내일로 여행을 계획하면서는 연극도 준비했었잖아. 내일로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교회에서 몇 주간 준비했던 연기를 하며 성극을 올렸었지.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굳이 일을 벌여서 연극까지 준비했던 걸 보면 용감해 보이기도 하고, 열정적이었단 생각이 들어.
너는 이렇게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늘 나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나야말로 너와 함께여서 했던 경험이 많아. 너는 나를 정말 용감하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봐주잖아. 그런데 내가 너 앞에서 그런 사람일 수 있었던 건 네가 있어서였어. 무엇을 하자고 하든 ‘좋아!’라고 말해주고, 잔뜩 즐거운 표정으로 옆에 있어주니까 나도 네 옆에서는 계속 계속하고 싶은 게 생각났던 것 같아.
네 앞에서 만큼은’ 내가 실수하지 않을까, 내가 하는 걸 싫어하지는 않을까’하며
겁쟁이처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내 청춘에 혼자였으면 그리지 못했을 장면들이 많이 생겼어.
너와 둘이 갔던 태국여행도 기억에 많이 남아. 특히 그때 너와 함께 만난 사람들. 가자마자 우리가 머물렀던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이었던 너트와 친구가 되어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잖아. 그리고 그날 너트를 따라 동네를 지나다가 너트의 친구였던 셰프의 가게도 가게 됐었어. 원래는 다음날 큰 행사가 있어서 손님을 받지 않는 날이었는데, 너트의 친구들이라고 특별히 우리 둘에게만 저녁을 해줬었지. 덕분에 가게 한편에 셰프의 공간에서 요리를 먹으며 셰프와 단란하게 대화도 나눌 수 있었어. 호주에서 5성급 큰 호텔의 주방장으로 일하다가, 손님이 자기 요리를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요리하고 싶어서 태국으로 돌아와 작은 식당을 차린 셰프의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사실 근데 나 혼자였다면 이 모든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거야. 난 영어를 못하니까! 말도 못 하면서 궁금한 건 많아서 이것저것 질문하면 네가 옆에서 나 대신 물어봐주고, 또 셰프의 말을 열심히 통역해 주었지. 이 만남뿐이 아니었어. 우리가 좋아서 몇 번이나 들렸던 소품가게의 텅도, 네가 옆에 있던 덕에 그 사람이 어떻게 물건을 수집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들을 수 있었지. 여행을 하면서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나는 영어도 못하는데 네가 있어서 같이 신나게 놀았던 것 같아. 역시 너랑 같이 있으면, 즐거운 일이 많아져.
언젠가 다시 멀지 않은 날에,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작은 꽃≫
김영경(글/그림), 반달(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