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 시샘에게
너와 함께 한 태국 여행은 내게도 오래도록 보듬을 추억이야. 태국 치앙마이를 여행하고 마지막 2박 3일을 방콕에서 머물렀을 때 기억나? 치앙마이 여행 내내 꼭 붙어 다니던 우리가 방콕에서는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었잖아. 너는 방에서 머물며 너의 시간을 갖고, 나는 방콕 시내를 혼자 돌아다녔지. 함께하다가도 각자의 색으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너와 나 사이의 여백이 마음에 들어.
난 방콕에서 꼭 가고 싶은 서점이 있었어.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의 일터였던 ‘The Travel Book Co.’ 서점을 오마주해서 만든 서점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영화 노팅힐과 서점이라니, 내가 좋아하는 것의 조합이니까 안 갈 수 없었지. ‘Passport Bookshop’이라는 서점이었어.
노팅힐에 나온 서점처럼 파란색 간판에 서점 이름이 써 있더라. 여행과 관련된 서적도 많았고. 노팅힐 서점과 비슷한 건 사실 이게 다긴 했어. 건물 자체가 좁고 길어서 구조가 신기했어. 문을 여니 바닥부터 천장 높이까지 책이 가득했어. 좁은데도 2층으로 가는 계단이 깨알같이 있길래 올라가니 잠시 머물러서 책 읽기 좋은 책상과 의자도 있었지. 음료를 주문할 수도 있었고. 서점을 찾아 헤매다가 흘린 땀을 식힐겸 그곳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어. 행복했다고 기억해. 해외 여행을 혼자서 가 본 적이 없어서 낯선 나라에서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던 거 같아. 방콕에서 혼자 그 좁은 서점에 있었던 순간이 그래서 더욱 뚜렷하게 남았나봐. 혼자서 이 새로운 도시의 매력을 누리는 그 순간에 괜히 한 뼘 더 큰 것만 같았고, 심심할 즈음 숙소로 돌아가면 내 친구 시샘이 있다는 점이 든든하게 느껴졌어. 이제 이곳에서 너를 위한 그림책을 만날 수만 있다면 완벽하겠다 싶었고.
우리가 대부분의 여행시간을 보낸 치앙마이에서도 너에게 주고 싶은 그림책을 계속 찾아 해맸지만, 이거다 싶은 책을 만나지 못했었거든.
낯선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언어로 된 그림책을 선물하는
우리의 전통이자 낭만이 이어져야 하는데 말이지.
눈치를 보니 너는 이미 날 위한 그림책 선물을 산 것 같아서 얼마나 조급했는지 몰라. Passport Bookshop은 그림책을 위주로 판매하는 서점이 아니었는데, 내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 제일 밑바닥에 있는 책장 마지막 칸에 그림책이 몇 권이 있더라고. ‘제발 좋은 책아 있어라' 주문을 걸며 쪼그려 앉아 책들을 들춰봤어. 그리고 거기에 ≪나랑 같이 놀자(Play With Me)≫가 있었던 거지.
≪나랑 같이 놀자≫의 주인공 소녀를 보며 네 생각이 났어. 아침 해가 뜨고 소녀는 같이 놀 친구를 찾아 나서. 메뚜기, 개구리, 거북이, 다람쥐, 새, 토끼 등 만나는 친구들에게 같이 놀자고 다가가지만 다들 소녀를 보고 깜짝 놀라 도망가 버려. 아무도 자신과 놀아주지 않아 슬퍼진 소녀는 가만히 연못가에 앉아있었지. 그 고요함 속에 떠나갔던 동물 친구들이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와. 그렇게 소녀는 자신이 함께 놀고팠던 친구들과 즐겁게 놀아. 그리고 그 모든 시간동안 따스한 햇빛이 변함없이 소녀를 비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그 때가 네가 한창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였잖아. 수많은 사랑의 시도들을 해 온 네 노력을 알기에, 나랑 같이 놀자며 다가가는 소녀의 모습에서 너가 보였어. 너의 진심과 다르게 떠나가는 관계들을 경험하며 네가 느꼈었던 슬픔도 생각났고. 때에 맞게 너에게 다시 다가올 좋은 관계들이 있을 거라는 말도 조심스레 전하고 싶었어. 그리고나서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한결같이 등장해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햇님이 보이더라. 소녀가 같이 놀 친구를 찾아다니는 동안 용기를 내고, 거절감을 느끼고, 조심스러워지기도 하고, 외로워하며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내내, 사실 소녀는 내내 따스한 햇빛 안에 있었잖아. 너에게도 그런 햇빛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 나 역시도 그 빛의 한 조각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었고.
내가 너에게 선물한 여행지에서의 그림책을 이야기하니까, 나도 네가 너의 여행지에서 나에게 선물했던 그림책이 하나 떠오르더라. ≪강(Am Fluss)≫. 너는 오스트리아의 한 책방에서 이 그림책을 품고 우리 집에 왔었어. 그리고는 이미 내 책장에 꽂혀 있는 한국어판 ≪강≫그림책을 보고 깜짝 놀랐었지. 직장 동료가 이미 내게 선물해줬던 책이었거든. 나는 두 권의 ≪강≫을 들고 오히려 좋았어.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그림책을 선물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그만큼 내가 떠오르는 책이라는 게 확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 책을 한 번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눈으로 읽게 되더라고.
책은 면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거기엔 낮에도 밤에도 창문 밖에 보이는 강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한 소녀의 뒷 모습이 있었어. 책장을 넘기면 소녀과 창밖으로 보이는 강의 풍경을 보며 떠난 상상의 여행을 볼 수 있었지. 강물이 흐르는 대로 작은 은빛 조각배를 타고 도시를 가로 지르고, 공장을 지나고, 농장과 들판을 지나다가, 정글도 만나고 바다까지 닿아. 비바람을 만나 결국 상상 속에서 깨어나는데, 깨어났을 즈음 책상 위에 있던 소녀의 도화지가 그녀의 그림으로 꽉 차있어. 상상과 그림의 세계에 몰입한 그 소녀를 보며 넌 내 생각이 났다고 했지.
이 책을 선물 받았을 때 나는 퇴사를 한 뒤 그림책 작가 지망생이 된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 어디가서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게 너무도 쑥스러웠던, 하지만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쑥스러움을 이겨서 그래도 꾸역꾸역 나를 그림책 작가 지망생이라고 소개하며 얼굴이 빨개지던 시절이었지.
그림책 작업을 하는 게 사실 아직 내 일 같지 않았던 때.
내가 이걸 해도 되나 싶어 매일 스스로를 검열하던 때.
그런 내게 그림작업 하는 소녀의 모습이 내 모습 같았다는 너의 말이,
그 마음이 담긴 이 책이 격려가 되었어.
나도 인정하기 어렵던 내 도전을 네가 먼저 인정해주는 것 같았달까. 넌 늘 그런 식이지.
그림책을 좋아한 건 19살 때부터였어. 그림책이 처음 내게 다가왔던 날의 장면은 내 인생의 장면 중 많이 아끼는 장면이야. 그 장면의 채도와 명도가 사랑하는 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과도 흡사해. 너에게도 너와 그림책의 첫 장면이 있겠지?
남들은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을 어쩜 그렇게 잘 아는지 다들 성큼 나아가는 것 같은데 혼자만 방향을 잃고 멈춰있는 것 같은 19살이었어. 속시끄러운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는 고요한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는 편이었어. 책을 읽으러 가는 건 아니었고, 기숙사 학교다 보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도서관 책장 속으로 피신 가는 거였지. 그러다가 제일 끝 책장에 꽂혀있던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라는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었어. 내가 얼굴 잘 빨개지는 쪽으로는 자신있는 편이니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홀린 듯 책을 뽑아들었고. 펼쳐보니 글자가 몇 자 없는 그림책이라 그 자리에 서서 한숨에 읽었어. 다 읽고는 너무 좋아서 한동안 책을 안고 그 자리에 서있었어.
일상의 기본 모드가 잔뜩 힘 주고 애쓰는 내가
그림책을 만난 순간 만큼은
애쓴 것 하나 없이 마치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다가
우연히 보물을 마주한 것 같아.
그래서 이 장면이 좋은가봐.
그 어떤 멋들어진 소설의 주인공보다도 그림책 속 얼굴이 빨개지는 귀여운 소년에게 깊게 공감했어. 아이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데, 그 쉬운 말과 그림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소중한 통찰을 주는 그림책이 매력적이더라. 그 쉽고도 깊음이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어. 빽빽한 서사와 어려운 묘사로 꽉 채워 압도하는 게 아니라, 커다란 그림과 적은 글자가 주는 여백 사이에 제 상상과 해석이 자유롭게 넘나들도록 하는 점도 좋았고.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물론 있겠지만, 그 말을 완고하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정히 건넨다고 느꼈어. 혹 독자가 다른 것을 느끼더라도 괜찮으니 마음껏 즐기라는 것 같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아
치밀하게 살고 있던 내게,
꼭 그렇게만 살지는 않아도 된다는
다정한 제안을 그림책에서 들은 거지.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의 마르슬랭과 르네를 보며, 나도 이 둘의 우정과 닮은 걸 공유하는 친구가 생기면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고 결심했었지. 그리고 언젠가 너에게 진짜 이 책을 선물했던 날에는 꿈을 이룬 것처럼 행복했어.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은커녕 좋아하는 색이 뭐냐는 질문에도 대답을 못 했던 열아홉 살이 이제는 서른세 살이 되었네. 이제는 좋아하는 게 없어 고민이었던 과거가 웃길 만큼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 고민인 사람이 되었어. 그동안 세상이 변했고, 나도 변했지만, 그런데도 그림책만은 꾸준히 좋아하고 있잖아. 쉽게 식거나 변하는 취향과 관점 속에서도 오랜 시간 좋아해 온 영역이 있다는 건 안심이 돼. 그래서 그림책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참 좋아해.
그리고 이렇게 오래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같이 좋아할 친구인 시샘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고.
너에게 고마운 거 목록이 쌓여있는데, 그 중에 하나야.
그림책을 좋아하는 과정이 처음처럼 늘 행복했던 건 아니었어. 특히 그림책 작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더 이상 모른척 하지 못하고 일단 해보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그림책 때문에 행복했던 순간 보다 괴로웠던 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도, 잘 그리지도 못하는 내가 그림책을 직접 쓰고 그리고 싶다니 이게 무슨 대책 없는 바람일까 싶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무시했던 날들이 길어. 잘 할 자신이 없는 걸 꾸역꾸역 하겠다고 붙들고 앉아 정말 당장 버리고 싶은 무언가를 그려내는 시간이 답답했지. 하고 싶은 일이라고 결정한 건 나인데 매일 회피하면서 그림책 작업을 미루기만 할 때도 스스로가 한심했고. 그림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꼭 그림책을 만드는 걸로 풀지 않아도 될 테고,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도 될텐데, 나는 이상할 정도로 작가로서의 길을 놓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도 붙들고 있었어.
슬픈 일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간신히 찾았는데,
이제는 그걸로 괴로움을 느낀다는 게.
결국에는 좋아하는 걸 잃을 것만 같은 불안이 높아졌지.
이 괴로움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조급함에 여러 가지로 애써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너에게도 그런 괴로움들을 마구 토로했던 날이 있어. 분명 좋아하기 때문에 시작한 길인데 이렇게 괴로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다가 그림책을 싫어하게 될까봐 무섭다고. 그때 네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
“진짜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괴로우면서도 하려는 거지.”
그 말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거대한 명제를 부쉈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즐거워야 한다.”라는 명제.
괴로움을 향한 결벽을 차차 버릴 수 있게 한 말이었어. 부서진 조각들은 강물의 물길에 휩쓸려가듯 사라지고, 나는 비로소 흐르는 강에 몸을 맡기듯 그림책 작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 같아.
이제는 괴로운 마음이 들면 내가 이 일을 괴로워도 하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는 훈장으로 여기기도 해. 물론 그러다가도 종종 지쳐. 최근에는 몸도 마음도 지쳐서 또 다시 내가 이 일을 계속 가져가는 게 맞나 그 지겨운 고민을 또 하게 되더라. 이번에도 지금까지의 뻔한 시나리오대로 그냥 다 그만둬버릴까 까지 생각이 닿았어. 하지만 이 속시끄러운 마음을 달랠 겸 도서관에 갔다가, 다시 또 그림책 코너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어. 역시나 그림책이 참 좋더라. 나도 이런 좋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더라. 이건 흡사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것 같아. 아직은 계속 하는 수 밖에 없어. 별 수가 없다.
아직도 첫 그림책을 완성하지 못한 채 4년 째 같은 책을 작업 중인 나는, 작업이 괴로울 때 종종 네가 선물해줬던 ≪강≫을 꺼내. 강을 따라 흐르는 소녀의 여정을 보며 내 그림책도 지금 강을 따라 흐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언제 도착할 줄 모르겠지만, 흐르는 중에 만나는 장면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싶어.
P.S. 그래도 올해는 제발 내 그림책을 완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4년 째 새해 결심히 그림책 완성인거 너무 물려.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나랑 같이 놀자≫
마리 홀 에츠(글/그림), 양은영(옮긴이), 시공주니어(출판사)
≪강≫
마크 마틴 (글, 그림) 서소영(옮긴이), 키즈엠(출판사)
≪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자끄 상빼(글/그림), 김호영(옮긴이), 열린책들(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