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이 다정에게
선물했던《강》그림책이 너에게 소중히 간직되었다니 기뻐. 나도 네 얘기를 들으니까 너에게 줄 책을 찾아 헤매던 여행의 순간이 떠올라. 함께 가지 않은 여행에서도 너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야. 그때 유럽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도시는 잘츠부르크였는데, 조그마한 동네 한복판에는 아름다운 강이 흘렀고, 중앙에는 근사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예쁜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어.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 언젠가 작가가 돼서 이 도시에 오래 머물며 글을 쓰고 싶단 꿈이 절로 생기더라. 강을 따라 걷고, 성벽 위로 올라가 야경을 보면 없던 영감도 생겨날 것 같았거든. 그때 그 상상 속에서 내 옆에 너도 있었어. 너도 이 도시를 좋아할 것 같았거든. 같이 일을 하다가 걸으러 나가고, 좀 더 걸어서 서점도 같이 다녀오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다정아, 우리에게 그럴 날이 올까? 각자 돌봐야 할 가정과 일상이 있는 지금은 꿈같은 얘기야. 학교를 졸업하고, 너에게 가족이 생기고, 우리가 사는 곳이 멀어지면서 요즘엔 한번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잖아. 나까지 가족이 생기면 더 그렇겠지? 그래도 언젠가는 또 같이 여행을 가자. 막연한 약속을 계속하자. 잘츠부르크의 예쁜 책방도 꼭 같이 가자.
네가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해 괴로워하면서도 오랜 시간 꾸준히 책을 만들어가는 걸 보면서 문득 《우로마》라는 그림책을 보여주고 싶어졌어. 이 그림책에서도 《강》에서처럼 그림을 그리는 소녀가 나와. 소녀가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해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는 순간을 보며 너는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거든. 책의 주인공인 우로는 어느 날 아빠와 함께 간 화방에서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캔버스 천을 발견하게 돼. 유명한 화가가 사려했을 만큼 아주 좋은 천인데, 그분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우로가 그 캔버스 천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 우로는 그 천에 선뜻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바라 보기만 해. 그래도 결국엔 아주 멋진 자화상을 완성하지. 얼마나 멋졌는지, 우로의 아빠는 자랑을 하려고 그림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서 우로의 그림을 보러 오라고 할 정도였어. 그런데 손님들이 오기로 한 날, 이상한 일이 생겨. 멋지게 완성했던 우로의 그림이 흘러내린 물감으로 엉망진창이 되었거든. 그 후로 몇 번이고 캔버스 위에 덧칠을 해서 자화상을 완성하지만 다음날만 되면 여지없이 그림은 엉망이 됐어. 우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지만, 밥도 제대로 안 먹어서 몸은 점점 야위고 생기를 잃어가. 결국 우로의 부모님은 우로가 걱정되어 그 캔버스를 버리는데, 우로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캔버스를 찾으러 집 밖으로 뛰쳐나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 가장 괴로운 일이 되었는데도, 다시 그 캔버스를 찾으러 가는 모습을 보며 네 생각이 나더라.
이 책은 내 인생그림책 중 하나이기도 해. 나도 너처럼 ‘왜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괴로울까’ 고민하던 시기에 만난 책이거든. 솔직히 나는 어려서부터 ‘일’에 대한 낭만이 없었어.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다 재미없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서 늘 취미와 일을 나눠서 생각했어. 졸업 후에는 작은 브랜드 회사에 취직해서 디자이너 겸 마케터로 일했는데, 평소 좋아하던 글을 쓰거나 그림책을 읽거나 하는 취미와는 완전히 상관없는 일이었지. 출근해서 주어진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이 중요할 뿐, 삶에 특별한 목표도 꿈도 없었어. 그런데 퇴사를 결정할 쯤에 처음으로 일과 취미를 하나로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결국 내 일상을 책임지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일주일 중에 상당한 시간을 일에 쏟아야 하는데 그 시간을 더 이상 때우듯이 보내고 싶지 않았거든.
일을 의미 있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을 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그때 떠올랐던 게 나에게도 ‘그림책’이었어.
다른 점이 있었다면 네가 ‘그림책 작가’라는 꿈을 선명히 찾은 것과는 달리, 나는 그림책으로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는 것이었지. 그래서 그림책으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을 찾기 위해 한동안 열심히 노력했어. 그림책 작가가 되는 것에도 기웃거려 보며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글 쓰는 수업을 듣기도 했었지. 그림책 작가가 아니라 서점 주인이 되고 싶은 건가 싶어서 ‘서점창업’에 대해 배우기도 했어.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소개하고 읽히는 게 좋았던 건가 싶어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 모임을 여러 번 열어봤지. 이렇게 여러 가지를 직접 경험하고 배우면서 내가 가장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재미있던 건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읽히는 일이었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작업실로 초대해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히고 대화를 나눴지. 나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림책의 매력을 알아가고, 그림책으로 스스로에 대해 깊이 깨닫고 나누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어. 드디어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이 괴롭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사람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면서부터, 오로지 나의 취향과 추억으로 채워졌던 그림책장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른 책들이 채워지기 시작했어. 물론 누군가를 위해 고른 책도 소중하지만, 그렇게 모인 책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순수하게 채워가던 좋아하던 취향이 침범당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또 그림책을 일로 읽어주는 일이 많아질수록, 막상 혼자 쉴 때는 그림책을 잘 보지 않게 되더라고. 그림책을 취미가 아닌 일로 삼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림책에 쓰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예전보다 작아진 기분이었어.
가장 좋아하던 것조차 일로 삼으면 결국엔 재미없어지는 걸까?
그림책은 내가 삶에서 몇 안되게 좋아하는 일인데,
그걸 잃어버리게 될까 봐 무서웠어.
내가 재작년에 갑자기 목공을 배웠던 거 기억나? 3개월 동안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4시간씩 목공을 했으니 꽤나 진심이었지. 목공은 언제든 배워보고 싶은 분야여서 배웠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보니 두려움 때문에 배웠던 것 같아. 그림책이 싫어질까 봐,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싫어서 새롭게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싶었어. 좋아하는 일이 없었을 때는 마냥 좋아하는 일만 생기면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살 줄 알았는데, 막상 좋아하는 일을 찾아도 두렵고 괴로운 일이 생긴다는 게 참 신기해.
사실 《우로마》라는 책을 이해하는 게 꽤 어려웠어. 우로가 그린 캔버스 속 그림이 자꾸 다음날마다 물감이 흘러내려서 엉망이 된다는 게 이상하잖아. 그림책적인 상상력을 더해보자면 밤마다 몰래 우로의 방에 찾아와 그림을 망치는 괴물이라도 나타나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니었거든. 묘하게 현실과 비현실이 섞여있는 설정들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꽤나 불친절한 책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우로마》가 인생책이 됐던 건 뒷장에 나오는 한 장면 때문이었어. 아빠가 버린 캔버스를 찾아 동네를 헤매던 우로가 캔버스를 찾은 뒤, 깜깜한 밤하늘에 뜬 달을 가만히 바라보는 장면.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아무 문장도 적혀있지가 않아. 이다음 장면에서 우로가 드디어 엉망이 되지 않는 자화상을 완성한 걸 보면 달을 보며 꽤나 중요한 걸 깨달은 것 같은데 말이야. 작가님이 우로가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얘기해주지 않는 걸 보며 또 한 번 ‘정말로 불친절하신 분이군’ 생각했지. 그런데 진짜 신기하게도 우로가 달을 보고 있던 그 장면에서 나도 우로가 돼서 같이 그 달을 바라봤어. 우로가 몇 번이고 엉망이 됐던 캔버스를 끌어안은 것처럼 나도 내 삶에 가장 소중했던 그림책을 끌어안고서.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밤의 순간이었지. 나는 그날 그림책 속의 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게? 우로가 그날 밤 달을 보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자화상을 그린 것처럼, 나도 그림책이 아닌 다른 분야의 일을 찾아보려 헤매다가 다시 그림책 앞으로 돌아왔어.
다른 걸 해보니까 알겠더라고.
내가 그림책이 싫어지는 것을 걱정했지만,
여전한 마음으로 그림책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책장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책들이 많아지는 것도, 혼자서 그림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내가 그림책을 좋아하고 이것을 일로 확장해 가며 겪는 변화의 과정 중 하나구나 싶었어. 그 과정이 낯설고 서툴었던 거지, 그림책을 싫어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었어. 좋아하는 마음이 확실해지니까 나는 다시 길을 찾은 것 같았어. 당분간은 또다시 애먼 것을 하면서 길을 잃지 않고, 그림책에 집중하려고.
우로와 너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겪는 각자의 괴로움의 이유는 다르지만, 그림책 속 달을 보면서는 우리 모두 자기 안에 있는 ‘좋아하는 마음’을 발견하는 건 비슷할 것 같아. 괴로우면서도 하는 이유는 좋아해서이고, 좋아해서 괴로움마저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 우로가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이 이전처럼 망가지지 않고, 밝게 웃고 있는 건 우로가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어느 책의 책제목처럼 우리를 구하는 건 그저 ‘좋아하는 마음’ 일지도 몰라. 어느 때고 그림을 그리다가 지치고 흔들리는 날이 올 때, 나에게 그랬든 너에게도 이 그림책이 네가 한 걸음 다시 내딛을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라.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우로마≫
차오원쉬엔(글), 이수지(그림), 신순항(옮긴이), 책읽는곰(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