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 시샘에게
네 편지를 받고 바로 ≪우로마≫를 주문했어. 난 네가 추천하는 건 묻지도 따지지 않고 좋아해 버리는 경향이 있잖아. 믿고 보는 시샘 추천. 취향의 교집합이 꽤 넓은 우리이기에, 네가 좋아하는 것들은 어련히 나도 좋아하겠지 싶어.
택배로 ≪우로마≫를 받고 실물을 딱 펼쳐보는데 한번 쯤 스치며 봤던 책인 걸 알았어. 이 책의 그림 작가인 이수지 작가님이 워낙 유명하시고, 나도 좋아하는 작가님이니까 분명 봤었을 거야. 그렇지만 슬깃 이 책을 들춰봤다가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살짝 어둡길래 제대로 읽지도 않고 덮었던 거 같아. 아마 네가 추천해주지 않았다면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을지도 몰라. 네 덕분에 이 책이 내 책장에 도착했네. 그리고 이 답장을 쓰기 위해 이 책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읽게 됐지.
친구와 노는 재미 중에 하나는 이런 거 같아.
나 혼자라면 하지 않았을 것을 친구 덕에 해보는,
친구따라 강남가는 그런 경험의 확장 말이야.
가령 우리가 대학생 때 너를 따라 나섰던 야밤의 바다 산책, 사다리 타고 올라 간 옥상 위 별 구경, 너와 구원이와 했던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내일로 기차 여행, 잔디밭에서 박스로 텐트 짓고 야외 취침, 작년에 너에게 전도 당한 마라샹궈의 맛 등 너가 아니었다면 내 생에 없었을 경험들이 내 시절 곳곳에 있어. 시샘 따라 제대로 읽은 ≪우로마≫는 어느덧 내게도 중요한 책이 되어버렸고.
좋아하는 일이 괴롭다는 사실로 고민할 때 이 책을 만났다는 너의 말대로, 좋아서 하는 일의 괴로움을 흠뻑 느낀 나 역시 이 책이 절절히 스미더라.
멋드러진 우로마(캔버스 천)를 앞에 두고도 선뜻 붓을 들지 못하는 망설임, 엉망인 그림 앞에서 주저앉는 절망감, 내가 그린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 가리고 싶은 마음, 아빠가 버린 캔버스를 굳이 또 다시 찾으러 나가며 괴로워도 계속해서 그려나가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은 나도 아는 맛의 감정이었어.
그림책을 만들면서, 또 글을 쓰면서도 늘 함께했던 감정이니까. 백지 앞에서 한 자도 쓰기 어렵거나 하나도 그릴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지.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는데, 난 장인이 아니니 그렇게 작업이 막혀있을 때 자꾸 도구를 사. 다 쓰지도 못할 색연필이 우리 집에 가득한 이유야. 얼마 전에 그림책 더미북을 드디어 완성했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꽁꽁 숨겨놨던 것도 우로와 비슷했지. 한동안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어.
주인공 우로가 그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뚫어내고 자신의 초상화를 기어코 완성한 뒤에도 천으로 완성작을 덮어두잖아. 그 이유가 책에 명확히 나와있지 않아서 의아하기도 했다가 찬찬히 생각해봤어. 그건 ‘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거 같아. 내가 그린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었으면 좋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어떨지까지 상상하면 불안이 확 몰려오잖아. 그 긴장감이 완성된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을 해집으니 일단은 천으로 그림을 덮으며 긴장감을 달랜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을 때 오는 불안도, 스스로의 높은 기준이 주는 아쉬움도 그림을 천으로 덮으며 일단은 차단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우로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주는 불안을 내리고 자신이 그림을 완성했다는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싶어. 우로가 정말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내가 그렇나봐.
난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림을 잘 못 그리겠어.
‘잘하고 싶은 마음'은 내게 큰 동력이자,
가장 큰 장애물인 것 같아.
정확히 말하면 ‘그림' 외의 영역에서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추진력을 활활 타오르게 휘발유 같은 역할을 해왔어. 공부도 그렇고 회사 다니며 일 할 때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고. 그런데 ‘그림'의 영역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날 꼼짝도 못하게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 덩이로 바뀌어.
나와 비슷한 바위 덩이를 조금씩 치워 내고 그림을 완성한 우로를 보며 생각했어. 우로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다 실패했다가도 결국에는 완성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아빠의 기대나,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신의 기준을 다 잊고 오직 그림에 몰두하는, 그 몰입의 즐거움 덕분인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나도 그림책 작업을 이어가려면 ‘잘 하고 싶은 마음'은 당분간 잊고 몰입의 즐거움을 경험해야한다는 걸 느꼈어. 그렇게 방향을 알았지만 막막하더라. 난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이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거 참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곤란했지.
퇴사 후 글을 쓰고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로서의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글은 어떻게든 계속 써온 거라 하던대로 꾸준히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다만 그림은 거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심정으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근육을 다시 움직이듯 시작한 거였으니 앞이 깜깜했어. 그렇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 혹시 내가 그림 천재일지도 몰라! 하며. 물론 내가 천재가 아니란 걸 아는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어. 나의 그림 실력은, 실력이랄 것도 없는 0의 상태였어.
≪우로마≫의 우로는 나보다 훨씬 낫지. 걘 그림을 잘 그리는 애였잖아. 난 그림도 잘 못그리면서 그림책 작가를 하겠다고 아등바등 하고 있으니 여러 번 ‘이게 맞나’를 물었지. 원래는 잘 할 수 있는 것만 하려는 성향이지만, 그림책은 그래도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있었어. 그만큼 수년간 그림책을 좋아하면서 쌓인 좋아하는 마음이 잘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버린 거지. 실패를 각오하고서라도 해보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림책을 보면 볼수록 그림책의 종류도 개성도 다양하더라고. 그림책 세계에서는 꼭 완벽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그림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선명하고 가치 있다면 그림책으로서 인정받는다 느꼈거든. 내 그림 실력은 부족해도 그림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들이 있으니까, 그걸 믿고 뛰어들었어.
본격 그림책 작업을 한다고 난리를 치며 애써 본 지 4년 정도 되었는데, 이제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좋아하는 마음'을 이겨버려. 사람은 좋아하는 것 보다 잘 하는 걸 해야한다는 뻔한 자기계발 문장에도 혼자 찔려해. 계속 이 길을 가는 게 맞나 고민스럽지. 잘 그렸다고 느낄 만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게 너무도 무력하고 슬프거든. 그림 나이로 치면 고작 4살인데, 난 겨우 4살 된 그림자아를 아직 이것도 못 하냐고 혼내며 그림 작업을 하고 있어.
어떤 분들은 그렇게 그림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림을 다른 그림 작가분께 맡기고, 글 작가만 하는 건 어떠냐고 의견을 주셔. 그런데 나도 의아 할 만큼 그 의견에 마음이 안 움직여. 꼭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건가 싶게 말야. 그렇게 씨름을 하다 제법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생생히 떠올랐어.
많은 아이들이 그러하듯 나도 어릴 때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그래서 11살 즈음의 방과 후 수업 시간에 그림 그리는 수업을 선택했는데, 그때 내가 해가 저무는 노을빛 바다와 절벽을 그렸어. 그림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 칭찬을 해주셨어. 선생님은 친구들에게 내 그림을 보라며, 색감이 정말 좋다고 하셨어. 그 칭찬에 심장이 쿵 내려 앉았어. 앞 편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초등학교 시절이 왕따가 왕왕 일어나던 시절이라 누군가가 칭찬을 받으면 그 아이가 질투의 대상이 되어 왕따를 당했거든. 나는 선생님의 칭찬을 뿌듯해 하기도 전에 내가 다시 왕따를 당할까봐 겁을 먹었어. 그래서 그 뒤로 그림 수업에 가지 않았어. 방과 후 수업이라 가지 않는다고 혼나지는 않았거든.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며 노는 행위를 아예 멈췄던 것 같아. 당시에는 미움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림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겨버린 거지.
후회를 하면서 사는 편은 아닌데, 그 순간은 20년이 지나 서른이 넘은 지금도 후회돼. 그때부터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며 꾸준히 그림을 끄적였다면,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어진 지금 조금이나마 나을텐데 말이야.
그리고 그 어린 날의 기억을 보듬으며 생각해.
난 사실 그때부터 계속 그림이 그리고 싶었었구나.
≪우로마≫를 보면서 마음을 다시 다잡았어. 우로의 어린시절이 그려진 장면을 보면 아빠의 가게 한 켠에서 고양이를 즐겁게 그리는 어린 우로가 있잖아. 나의 어린시절에 놓쳐버린 그림의 즐거움을 앞으로 더 많이 쌓을 필요가 있겠다 싶어. 그래야 좋아하는 마음이 ‘잘 하고 싶은 마음'을 거뜬히 데려갈 근육이 생길 것 같아.
여러 시도를 해 봤지만 난 ‘잘 하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K.O. 시킬 위인은 못 돼.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를 않잖아. 요즘은 잘하고 싶은 마음을 내 작업메이트 고양이 정도로 생각해. 잘할래미야오(막 지은 고양이 이름)는 내가 그림책 작업을 하려고 할 때마다 자꾸 내 도화지 위에 철퍽 앉아. 그래서 하나도 그릴 수 없을 때가 있지. 그럴 때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잘하고 싶구나. 그래서 그렇구나.’하고 한동안 멍을 때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잘할래미야오는 조금씩 종이를 내어주지. 그 순간에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그리는 거야.
일단은 잘 하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되
그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울지 않게
관리해주는 게 필요한 것 같아.
결국 좋아하는 마음을 눌러버리는 건 ‘두려움'이니까.
잘 하고 싶은 마음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서 하루에도 수 백번 저울 눈금의 위치가 바뀌며 마음의 형질을 바꾸더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두려움까지 되지 않으려면 ‘즐거움’을 계속 주입해야 하는 것 같아.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괴로움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즐거움을 아예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우로마≫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했어.
≪우로마≫를 다 읽고 피터 레이놀즈의 ≪점≫이 생각났어. 워낙 유명한 그림책이지.
여기에서도 베티라는 아이가 하얀 백지를 그대로 두고 미술 선생님께 아무 것도 못그리겠다고 이야기해. 그러자 선생님이 어떤 것이든 좋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지. 베티는 그냥 점을 하나 그려. 선생님은 그 점을 유심히 보고는 그 종이에 이름을 써서 제출하라고 하셔. 선생님은 다음 미술 시간에 그 점 그림을 금테 액자에 걸어두어. 베티는 자기가 그 점보다는 더 나은 점을 그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점점 더 다양한 도구로 다양한 점들을 그려나갔지. 나중에는 베티가 그린 점들로 전시를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점 그림을 그렸어.
우로와 베티처럼, 나도 일단 한동안 정체기가 왔던 그림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겠어. 엄청난 대작은 어차피 만들지 못할테니 그 욕심은 거두고, 마음에 드는 점이라도 그린다는 생각으로 그려나가고 싶어. 결과보다는 내가 느낀 즐거움에 무게를 좀 두고 말야.
그림책 작업이 멈춰있을 때면, 너와의 대화가 다시 움직일 힘을 줘왔던 것 같아. 이번에도 너의 편지와 너가 추천해 준 ≪우로마≫를 통해 다시 한 걸음 딛을 힘을 얻었네. 역시나 참 고마워.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우로마≫
차오원쉬엔(글), 이수지(그림), 신순항(옮긴이), 책읽는곰(출판사)
≪점≫
피터 H. 레이놀즈(글/그림), 김지효(옮긴이), 문학동네(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