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이 다정에게
얼마 전에 집에 대학교 때 후배가 놀러 왔었어. 같은 동아리어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야. 이제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기 위해 서울에 왔다고 하더라고. 개강하기 전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선배를 만나는 중이라고 했어. 후배의 얘기를 듣다 보니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 언젠가의 나와 꼭 닮았더라고. 나 대학교 1학년 때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아침, 점심, 저녁식사 때마다 약속이 있었어. 그것도 매일 다른 사람으로. 한 학년이 40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대학교에 와서 많은 사람을 만나니 너무 신나더라고. 그런데 이 후배는 나보다 더하더라. 얘는 아침, 점심, 저녁에 중간에 카페 갈 사람까지 따로 있었대. 대단하지? 그런데 얘도 나도 그 생활이 오래가진 못했더라고. 현타가 와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즐거워도 결국엔 마음이 채워지진 않는 거지. 그래서 그다음엔 가까운 사람에게 정성을 쏟았는데 그 친구는 요즘 가장 가까웠던 친구와 사이가 많이 멀어졌다고 했어. 인간관계가 어렵고 회의감이 든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이해가 잘 됐어. 온갖 사람에게 흩뿌리던 애정을 가까운 몇몇에게 가득 부어주었는데, 돌아오지가 않는 거지. '나만 좋아하나, 나만 소중히 여기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운하기도 하고. 왜 모든 관계에서 나만 이렇게 애를 써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하고. 나와 닮은 후배가 나와는 조금 다른 길을 찾기를 바라며 《나랑 같이 놀자》그림책을 보여줬어.
기억나? 이 책 우리 같이 갔던 치앙마이 여행에서 네가 나한테 선물해 준 그림책이잖아. 한창 인간관계로 우울했던 내가 기분전환하려고 처음으로 갔던 해외여행이었어.《나랑 같이 놀자》에서는 집 앞 들판에 놀러 나간 아이가 동물들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잖아. 그런데 그 책 앞부분에서 아이는 무수한 거절을 당해. 메뚜기에게 ‘나랑 같이 놀자’하면서 손을 내밀지만 도망가고, 개구리한테 다가가도 폴짝 달아나고, 거북이한테 다가가도 물아래로 슝 사려져 버리는 거야. 뱀도 다람쥐도 사슴도 모두가 떠나잖아. 온갖 동물에게 거절받는 여자애의 모습이 꼭 나 같았어.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오래된 친구, 늘 마음이 쓰여서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 너만큼이나 평생 갈 줄 알았던 솔메이트 친구, 거기다가 내가 너무 좋아했던 남자친구까지. 1~2년간 갑작스럽게 여러 가지 관계에서의 멀어짐과 이별을 겪으며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다 떠날까 힘들었을 때였거든. 아이 입장이 돼서 대신 화도 났어. ‘잡아서 괴롭히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함께 놀고 싶어서 손을 내민 것뿐인데 왜 다 떠나는 거야!’ 하면서. 어쩌면 이건 그림책 속 아이에게 감정이입한 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의 소리였는지도 몰라. ‘내가 잘해주고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줬는데 왜 다 나를 떠나는 거야!’하는 억울한 마음. 난 그저 같이 행복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거든. 책에서 모든 동물이 떠나고 난 뒤, 속이 상한 아이는 한쪽 구석에 가만히 풀이 죽은 채로 앉아. 그런데 그 다음장에서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아까 도망갔던 동물들이 하나, 둘 아이에게 다가오거든. 그 장면을 보면서 처음으로 내가 관계에서 잘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어.
그림책 속 아이가 그저 동물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손길을 내밀었겠지만, 그 손이 메뚜기에게는 너무 컸을 수 있고, 자라에게는 빠르고, 개구리에게는 뜨거웠을 수 있었겠구나 싶더라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했던 말과 행동도 때로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급하고, 때로는 뜨거울 수 있었겠다는 게 처음으로 인정이 됐어. 그러고 나니 그토록 이해할 수 없던 사람들이 이해가 되고, 내가 경험한 이별도 그럴 수 있었겠다 받아지더라.
그림책을 품에 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었어. 한동안은 나도 그림책 속 아이처럼 조금 가만히 멈춰서 기다려야겠다고. 나는 원래 불편한 게 있으면 대화해서 이야기를 듣고 푸는 걸 좋아하잖아.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맞춰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에게 맞게 다가오고 표현할 수 있게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 아이가 가만히 모든 것을 멈추자 동물들이 자신의 속도와 모양대로 다가온 것처럼.
나와 참 많이 닮은 후배가 이 책을 읽은 뒤 그러더라고.
친한 친구와의 관계에서 조금 힘을 빼야겠다고.
그 친구는 내가 소중한 관계들을 잃은 후에야 깨달은 걸 벌써 안 것 같아.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힘을 뺄 기회가 생긴다는 게 조금 부럽기도 했어.
다정아 내가 한창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 때, 너한테 ‘우리 사이도 멀어질 수 있을까?’하고 물었던 거 기억나? 사실 우리 둘은 친구가 되고 나서 한 번도 크게 싸우거나 미워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너와의 사이처럼 한 번도 깨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관계들이 깨지는 걸 겪어보니 우리 사이도 장담할 수 없겠더라고. 그때 내 질문에 네가 했던 말도 기억나니? 그때 네가 ‘그건 내가 더 궁금한데?’ 이랬었어.
그때 너의 질문에 지금 대답해 본다면, 나는 이제 우리 사이조차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아마 대학생 때의 나라면 ‘우리 사이는 절대 멀어질 리 없어’ 호언장담을 했겠지만 이제는 알거든. 인간관계라는 게 꼭 대단한 사건이나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아도, 어느 날 자연스레 멀어질 수도 있다는 걸 말이야. 붙잡을 도리도 없이. 사람 관계가 그렇게 논리적이거나 개연성이 있지 않더라고. 그런데 그래서 언젠가 멀어지겠다는 얘기는 아니야.
다만 이제는 ‘우리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라는 믿음을 붙잡는 대신에,
그저 매 순간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내 마음을 붙잡아.
오늘 오랜만에 너랑 메시지를 주고받았잖아. 때로는 우리가 각자 사는 먼 거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이 꼭 붙은 듯이 가깝다가도, 어쩔 때는 별일 없이도 사이가 조금 서늘하고, 조금 멀게 느껴지는 때가 있어. 어쩌면 어렸을 때는 ‘요즘 우리 사이 왜 이래?’하면서 커다란 문제를 맞닥뜨린 듯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이제는 내가 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믿고,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믿으며 ‘다음엔 더 일찍 안부를 물어야지.’ 하고 생각해.
우리는 이제 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잖아. 그 시간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묻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너는 나에게 낯설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 어쩌면 가끔씩 느껴진 우리 안의 거리감이고, 서늘함이진 않았을까. 문득 오늘 편지를 쓰면서 깨달아. 그래서 특별히 다음번에는 이런 걸 물어보고 싶어. 요즘은 남편과는 어떻게 잘 지내냐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멀어진 시간 속에서 너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너의 남편이더라고. 그 사람과 함께하기로 한 결단이 네 삶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왔잖아. 살던 곳도 바뀌고, 또 아이를 낳아 기르기도 했고. 네가 요즘 맞이하고 있는 그 시간이 궁금해. 그렇게 너의 현재를 들으며 그 시간들도 함께 하고 싶어. 조만간 전화통화를 해서 네 목소리를 들어야겠어. 전화하기 전에 편지로 먼저 마음을 전해.
다정아, 월요일에 전화할게.
나랑 같이 놀자.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나랑 같이 놀자≫
마리 홀 에츠(글/그림), 양은영(옮긴이), 시공주니어(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