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 Oct 17. 2023

절대 깨지지 않는 관계가 있을까?

시샘이 다정에게

얼마 전에 집에 대학교 때 후배가 놀러 왔었어. 같은 동아리어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야. 이제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기 위해 서울에 왔다고 하더라고. 개강하기 전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선배를 만나는 중이라고 했어. 후배의 얘기를 듣다 보니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 언젠가의 나와 꼭 닮았더라고. 나 대학교 1학년 때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아침, 점심, 저녁식사 때마다 약속이 있었어. 그것도 매일 다른 사람으로. 한 학년이 40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대학교에 와서 많은 사람을 만나니 너무 신나더라고. 그런데 이 후배는 나보다 더하더라. 얘는 아침, 점심, 저녁에 중간에 카페 갈 사람까지 따로 있었대. 대단하지? 그런데 얘도 나도 그 생활이 오래가진 못했더라고. 현타가 와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즐거워도 결국엔 마음이 채워지진 않는 거지. 그래서 그다음엔 가까운 사람에게 정성을 쏟았는데 그 친구는 요즘 가장 가까웠던 친구와 사이가 많이 멀어졌다고 했어. 인간관계가 어렵고 회의감이 든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이해가 잘 됐어. 온갖 사람에게 흩뿌리던 애정을 가까운 몇몇에게 가득 부어주었는데, 돌아오지가 않는 거지. '나만 좋아하나, 나만 소중히 여기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운하기도 하고. 왜 모든 관계에서 나만 이렇게 애를 써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하고. 나와 닮은 후배가 나와는 조금 다른 길을 찾기를 바라며 《나랑 같이 놀자》그림책을 보여줬어.



기다릴 때 비로소 보이는 것


기억나? 이 책 우리 같이 갔던 치앙마이 여행에서 네가 나한테 선물해 준 그림책이잖아. 한창 인간관계로 우울했던 내가 기분전환하려고 처음으로 갔던 해외여행이었어.《나랑 같이 놀자》에서는 집 앞 들판에 놀러 나간 아이가 동물들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잖아. 그런데 그 책 앞부분에서 아이는 무수한 거절을 당해. 메뚜기에게 ‘나랑 같이 놀자’하면서 손을 내밀지만 도망가고, 개구리한테 다가가도 폴짝 달아나고, 거북이한테 다가가도 물아래로 슝 사려져 버리는 거야. 뱀도 다람쥐도 사슴도 모두가 떠나잖아. 온갖 동물에게 거절받는 여자애의 모습이 꼭 나 같았어.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오래된 친구, 늘 마음이 쓰여서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 너만큼이나 평생 갈 줄 알았던 솔메이트 친구, 거기다가 내가 너무 좋아했던 남자친구까지. 1~2년간 갑작스럽게 여러 가지 관계에서의 멀어짐과 이별을 겪으며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다 떠날까 힘들었을 때였거든. 아이 입장이 돼서 대신 화도 났어. ‘잡아서 괴롭히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함께 놀고 싶어서 손을 내민 것뿐인데 왜 다 떠나는 거야!’ 하면서. 어쩌면 이건 그림책 속 아이에게 감정이입한 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의 소리였는지도 몰라. ‘내가 잘해주고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줬는데 왜 다 나를 떠나는 거야!’하는 억울한 마음. 난 그저 같이 행복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거든. 책에서 모든 동물이 떠나고 난 뒤, 속이 상한 아이는 한쪽 구석에 가만히 풀이 죽은 채로 앉아. 그런데 그 다음장에서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아까 도망갔던 동물들이 하나, 둘 아이에게 다가오거든. 그 장면을 보면서 처음으로 내가 관계에서 잘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어.


그림책 속 아이가 그저 동물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손길을 내밀었겠지만, 그 손이 메뚜기에게는 너무 컸을 수 있고, 자라에게는 빠르고, 개구리에게는 뜨거웠을 수 있었겠구나 싶더라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했던 말과 행동도 때로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급하고, 때로는 뜨거울 수 있었겠다는 게 처음으로 인정이 됐어. 그러고 나니 그토록 이해할 수 없던 사람들이 이해가 되고, 내가 경험한 이별도 그럴 수 있었겠다 받아지더라.


그림책을 품에 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었어. 한동안은 나도 그림책 속 아이처럼 조금 가만히 멈춰서 기다려야겠다고. 나는 원래 불편한 게 있으면 대화해서 이야기를 듣고 푸는 걸 좋아하잖아.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맞춰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에게 맞게 다가오고 표현할 수 있게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 아이가 가만히 모든 것을 멈추자 동물들이 자신의 속도와 모양대로 다가온 것처럼. 


나와 참 많이 닮은 후배가 이 책을 읽은 뒤 그러더라고.

친한 친구와의 관계에서 조금 힘을 빼야겠다고. 

그 친구는 내가 소중한 관계들을 잃은 후에야 깨달은 걸 벌써 안 것 같아.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힘을 뺄 기회가 생긴다는 게 조금 부럽기도 했어.



절대 깨지지 않는 관계가 있을까?


다정아 내가 한창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 때, 너한테 ‘우리 사이도 멀어질 수 있을까?’하고 물었던 거 기억나? 사실 우리 둘은 친구가 되고 나서 한 번도 크게 싸우거나 미워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너와의 사이처럼 한 번도 깨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관계들이 깨지는 걸 겪어보니 우리 사이도 장담할 수 없겠더라고. 그때 내 질문에 네가 했던 말도 기억나니? 그때 네가 ‘그건 내가 더 궁금한데?’ 이랬었어.


그때 너의 질문에 지금 대답해 본다면, 나는 이제 우리 사이조차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아마 대학생 때의 나라면 ‘우리 사이는 절대 멀어질 리 없어’ 호언장담을 했겠지만 이제는 알거든. 인간관계라는 게 꼭 대단한 사건이나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아도, 어느 날 자연스레 멀어질 수도 있다는 걸 말이야. 붙잡을 도리도 없이. 사람 관계가 그렇게 논리적이거나 개연성이 있지 않더라고. 그런데 그래서 언젠가 멀어지겠다는 얘기는 아니야. 


다만 이제는 ‘우리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라는 믿음을 붙잡는 대신에, 

그저 매 순간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내 마음을 붙잡아. 


오늘 오랜만에 너랑 메시지를 주고받았잖아. 때로는 우리가 각자 사는 먼 거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이 꼭 붙은 듯이 가깝다가도, 어쩔 때는 별일 없이도 사이가 조금 서늘하고, 조금 멀게 느껴지는 때가 있어. 어쩌면 어렸을 때는 ‘요즘 우리 사이 왜 이래?’하면서 커다란 문제를 맞닥뜨린 듯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이제는 내가 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믿고,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믿으며 ‘다음엔 더 일찍 안부를 물어야지.’ 하고 생각해. 


우리는 이제 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잖아. 그 시간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묻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너는 나에게 낯설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 어쩌면 가끔씩 느껴진 우리 안의 거리감이고, 서늘함이진 않았을까. 문득 오늘 편지를 쓰면서 깨달아. 그래서 특별히 다음번에는 이런 걸 물어보고 싶어. 요즘은 남편과는 어떻게 지내냐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멀어진 시간 속에서 너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너의 남편이더라고. 사람과 함께하기로 결단이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잖아. 살던 곳도 바뀌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도 했고. 네가 요즘 맞이하고 있는 시간이 궁금해. 그렇게 너의 현재를 들으며 그 시간들도 함께 하고 싶어. 조만간 전화통화를 해서 네 목소리를 들어야겠어. 전화하기 전에 편지로 먼저 마음을 전해. 


다정아, 월요일에 전화할게.
나랑 같이 놀자.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나랑 같이 놀자≫

마리 홀 에츠(글/그림), 양은영(옮긴이), 시공주니어(출판사)



이전 07화 잘 하고 싶은 게 잘못은 아니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