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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tryvirus Jul 30. 2020

슬프도록 찬란한 '물의 언어'

활력을 주는 비타민詩

슬프도록 찬란한 물의 언어

- 김효선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문학수첩, 2020) 서평 -



오성인(시인)



오월 끝 무렵부터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읽고 쓰는 전반의 행위에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 신종 감염병을 매개로 세계의 비극이 나날이 확산되는 가운데 나는 중심이 부재한 채 방황하듯 유영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슬픔을 방관하며 염치없이 살아남았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녹음이 온통 통증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럼에도 다시, 고해에 닻을 올린다.


『서른 다섯 개의 삐걱거림』(황금알, 2008),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문학의 전당, 2016)로 폭넓고 독특한 서정을 선보여 온 김효선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문학수첩, 2020)으로 독자들을 찾았다. “신발은 너무 크고 비스킷은 부서지기 쉽고, 고등어는 냄새나, (「길 위의 길」) 부분)”고 ‘불안’이 “벽을 타고 자라나는, (「여자, 어머니의 집」 부분)” 「부음(訃音)의 날들」을 거쳐 “손금 어디에 느지막이/내게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것인지(「늦게 피는 꽃」 부분)”, “왜 들판에서 파스 냄새가(「염소의 시간」 부분)” 나는지, “우리가 별이라고 믿었던(「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부분)” 순간과 존재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탐구해 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일상과 자아(혹은 내면)의 합일을 추구하여 이를 기반으로 ‘전혀 새로운’ 서정을 창조해낸다. 독일의 신부인 안셀름 그륀(Anselm Gruen, 1945∼ )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불어대는 피리소리에 따라 춤을 추지 않고 내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내면의 멜로디에 따라 춤을 추면 우리는 자신과 하나로 일치한다. 문제는 이 내면의 멜로디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찾기 위한 전제조건은 고요이고, 고요 가운데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고요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고요함에 젖어들면 처음에 만나는 것은 내면의 온갖 잡음들이다. 그러나 끈기 있게 그 안에 머물러 계속 고요 안으로 파고들어 가면 우리는 작은 소리들을,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이 반영된 소리들을 듣게 된다. 피타고라스학파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주가 온통 소리로 가득 차 있듯이 우리의 영혼도 분명 그러하다. 우리의 영혼 안에 일반적으로 들을 수 없는 우주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어떤 세계의 신적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요는 귀를 열어 우리 영혼의 멋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문이다.

     

안셀름 그륀고요의 멜로디내면의 멜로디(성바오로, 2014)



그륀이 그의 저서에서 언급한 ‘고요 가운데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를 김효선은 시집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의 일상이 녹아 있는 제주라는 구체적 공간부터 무의식의 순간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보인다. 그 기점은 애월에서의 우연한 몽상이다.          



견딘다,

빛으로 오는 것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전생이거나


왼쪽 어깨였던가요

너무 오래 사랑한 죄


오후 내내 반짝이는 윤슬이었다가

저녁이 오면 사라지는 꽃들


초승에서 하현으로 넘어가는 동안

바다는 멀미로 기억을 잃고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너는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야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나요?


하루에 70만 번 들썩이고 뒤집어지는

파도가 바다의 운명이라면

어느 가슴에서 뜨고 지는 달이길래

가도 가도 먼 지척일까


잘린 손톱들 모두 애월 바다에 와서

오래오래 뒤척이다


거스러미로 돋아나는,


김효선몽상애월에서」 전문어느 악기의 고백(문학수첩, 2020)


“빛으로 오는 것들”을 “견딘다,”고 고백하는 화자는 그것이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전생”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왼쪽 어깨”에 지고 있던 “너무 오래 사랑”했던 어떤 “죄”를 증언하는데, “오후 내내 반짝이는 윤슬이었다가/저녁이 오면 사라지는 꽃들”로 장면과 모습이 바뀐다. 나아가 이것은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화자가 “아는 얼굴이 아니”거나 “하루에 70만 번 들썩이고 뒤집어지는/파도”로 결부되어지는데 화자는 바로 여기에서 삶과 “운명”은 늘 예측 불허하며, 그렇기에 매일 “뜨고 지는 달이” “가도 가도 먼 지척”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한 화자의 시선은 “거스러미”처럼 “돋아나는,” 존재들에게 닿는다.



나는 언제나 먼저 가 기다리는 쪽

울타리에 심장을 얹은 명자꽃     


별보다 창문이 많은 골목 봄이면 포클레인이 벽을 부순다 심장을 뚫고 허공을 자른다 연대하는 창문과 따돌리는 불빛 너는 어느 창문에서 왔니 도무지 아침을 아침이라 부를 수 없는 불투명의 눈빛들


장미라고 부르면 가시의 마음이 될까 너를 자기라고 부르면 자기가 내가 되는 걸까 내가 자기가 되는 걸까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소리만 요란하다


백 년에 딱 한 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는 눈먼 거북과 딱 한 개의 구멍뿐인 나무 그 둘이 만날 확률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북쪽 창문으로 들어온 먼지가 내 어깨에 내려앉아 밤마다 같은 꿈을 꿀 확률은


그러나 더 높은 곳에 벼락이 있다

우연히 맞아 본 적 있는 번개처럼


      기연(機緣)」 전문같은 책



“언제나 먼저 가 기다리는 쪽”이었다고 고백하는 화자는 자신이 “울타리에 심장을 얹은 명자꽃”이라고 말한다. 명자꽃으로서의 그는, “별보다 창문이 많은 골목”을 오랜 기억을 더듬듯 걸으며 “봄이면” “벽을 부”수고 “심장을 뚫고 허공을” 잘랐다는 “포클레인”이라는 현대 문명의 일방적인 폭압을 고발함과 동시에 그에 저항해 “연대한 창문과 따돌리는 불빛”에 대해서 증언한다. “도무지 아침을 아침이라 부를 수 없는 불투명의 눈빛들”을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화자의 목소리는 한없이 아프고 어둡고 쓸쓸하다. 그것은 화자로 하여금 명자꽃의 삶을 살게 한 원인인 까닭이다. “장미라고 부르면 가시의 마음이 될까 너를 자기라고 부르면 자기가 내가 되는 걸까”라고 자문하는 그의 귓전에는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이어 그는 “백 년에 딱 한 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는 눈먼 거북과 딱 한 개의 구멍뿐인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살아온 환경, 방식 등이 서로 다른 “둘이 만날 확률”은 그야말로 “운명”과 다름없는데, “북쪽 창문으로 들어온 먼지가”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아 밤마다 같은 꿈을 꿀 확률”은 과연 무엇이라 형용해야 할지 화자는 고뇌한다. 불현 듯 “우연히 맞아 본 적 있는 번개”에 대한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친다. 10여 년 전,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강정마을에서는 군과 주민 사이에 한바탕 갈등이 빚어졌다. 결국 2015년에 해군기지가 완공되면서 논란은 종지부를 찍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제 2공항 건설 문제를 놓고 제주는 몸살을 앓고 있다. 전생과 이후의 생이 서로 다른 형상으로 윤회하듯, 삶이 계속되는 한 논란과 비극도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것을 시에서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그 때문에 일부 대목에서는 제주의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하는데, 시인은 담담히 그것을 마주한다.



지문을 찍고 나면

서쪽 심장을 내준 것 같아

지문 인식기를 통과할 때마다

누군가 대신 거기 서 있다


운명의 절반을 껴안아 무너져 버린 부위


먼발치에 서서 무른 사과를 먹는 사자처럼

나무 위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독사처럼

서쪽에서 태어난 몽고반점은

간절하다가도 독기가 차올라 숨이 멎는다


굴러갔는데 굴러오지 않는 대답

구름도 숨어 버린 하늘에

누가 엎드려 울다 간 흔적일까

강물에 두 손을 모으고 오래 물을 흘려보냈다


무엇으로 서쪽을 닦아 내 지문을 지울 것인가

가만히


찔레꽃이 핀다 슬개골이 아프다


      사랑하는 서쪽」 전문같은 책



“지문을 찍고 나면/서쪽 심장을 내준 것 같”다고 말하는 화자는 “지문 인식기를 통과할 때마다 누군가 대신 거기 서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서 있었다고 하는 그곳은 다시 “운명의 절반을 껴안아 무너져 버린 부위”로 형상화되는데, “먼발치에 서서 무른 사과를 먹는 사자”와 “나무 위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독사처럼” 묘사되는 그 ‘누군가’의 정체는 “서쪽에서 태어난 몽고반점”이다. “간절하다가도 독기가 차올라 숨이 멎”고 “굴러갔는데 굴러오지 않는 대답”, “엎드려 울다 간” 누군가의 “흔적” 등으로 변주되는 몽고반점은 인간이 지니는 공통적인 태생의 증표이지만 그것이 어떤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지, 향후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시업(詩業)을 운명으로 삼은 화자는 “무엇으로 서쪽을 닦아” 자신의 “지문을 지울 것인가”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답을 갈구한다. 문득 그는 “찔레꽃” 가시에 찔린 것처럼 “슬개골이 아”파 오지만 여정을 이어간다. 풀리지 않은 지문이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의 암호는

방금 벽이 도착했습니다


날개를 기다리는 의자들

골무에 끼워 둔 머리를 꺼내자

발가락을 사고 싶어요 손가락을


그래서 데려갔어요 모래는

우리의 암호를 감쪽같이 먹어 치웠어요


앵두라는 이름으로 걸어올 수는 없어요

저수지에 입술이 떠오르면 개들이 몰려오고

날아요 물수리들 앵두라는 이름으로

근친의 힘은 비참한 죽음에 있다고

내가 말했나요?


기지개를 켰을 뿐인데 얼굴이 무너졌다면

네 다리로 달아날 수 있나요

직립이 직립을 보호할 수 없다면

우리의 마지막 진술은 의자를 버려야 한다는


방금 두 번째 벽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날아요 뭉개진 무화과를 졸이는 중이거든요



* 소란스러운 현상을 일으키는 정령.




      폴터가이스트*」 전문같은 책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란 집 안을 흔들고 물건을 날아다니게 하거나 가구 등을 부숴버리는 정령의 일종이나 그와 다름없는 현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기이하고 묘한 소리가 나는 것에서부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집이 흔들리는 현상이 있으며, 갑자기 불을 내거나 선물 안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사춘기 주로 소년과 소녀에게 붙는 영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육체·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의 불안한 정서로 인해 야기되는 사건이나 사고를 지칭하는 것이 아무래도 적합할 것이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언제 어디로 나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갑작스레 “벽”이 생성되어 곧잘 쓸쓸해하거나 기존의 세계나 사물에 대해 호기심이 증폭된다. “날개를 기다리고 있는 의자들”과 “골무에 끼워”져 있다가 “꺼내”진 “머리”에 쉽게 동화되고 연민을 느낀다. 누구나 그런 시기를 겪었을 것인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앵두라는 이름으로 걸어올 수 없”고, “저수지에 입술이 떠오르면 개들이 몰려오고”, “앵두라는 이름으로” “물수리들”이 “날아”오르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규범이나 오래된 질서에 가둬 놓으려 한다. 그저 “기지개를 켰을 뿐인데 얼굴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가혹한 체벌이 내려지는가 하면 “네 다리로 달아”나지 못한 채 제도권의 통제와 감시 아래 “의자를 버려야 한다는” “진술”을 강요당한다. 최근 들어 급격히 증가한 일부 청소년들의 극단적인 일탈 행위에는 이러한 배후가 있는 것이다. “모래는/우리의 암호를 감쪽같이 먹어 치웠”다는 진술은 그래서 서글프고 참담한 문장으로 다가온다. ‘라떼는-(나 때는-)’이라는 유행어가 괜히 나왔겠는가. 그럼에도 정령은 “뭉개진 무화과를 졸이”며 “우리 함께 날”아 오르자 권한다. 김효선 시인만의 독특한 서정과 ‘휴머니즘’이 조화하고 발현되는 지점인 것이다.

따라서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동물과 “멸종 위기에 처한 연애”, 생의 가장자리만을 골라 후드득 떨어지는/불운의 물방울들“은 그런 그가 포용하는 대상이자 그의 시를 밀고나가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막의 별은 유골의 표정을 베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을 내민다


예언을 동반한 통증으로

어떤 세포는 말없이 사라지고

부러진 팔과 절뚝거리는 다리로

심장이 고장 나 그르렁거려도

아침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라앉은

모래의 부기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도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사자도

멸종 위기에 처한 연애마저도


반가사유하며 끌어안는 모래 산

희망을 껴안을수록

두 다리는 지워진다 아무도

실종을 묻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으므로


끓는점을 넘기면 호흡은 生을 넘어

사막의 표정을 갖는다

우리는 난파된 우주의 피조물들

내일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저물어 본 적 없는 얼굴은

모래로 기억을 덮어 버린다


내일도

가장 어렵게 읽히는 난파된 기억을 삽니다


      해골 해안」 전문같은 책          



숲에서 빗소리를 들으면

누군가의 생을 대신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삼백예순 개의 계단을 다시

내려가야 하는 날도 있는 것처럼

생의 가장자리만을 골라 후드득 떨어지는

불운의 물방울들


서로의 음악은 숲을 듣지 않아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

빛바랜 쪽이 가장 먼저 지운 귀


나뭇가지에 속고 지렁이에 움찔거리며

미물에서 느끼는 공포야말로

가장 확실한 숲의 정령

안녕하세요 안녕하-

낯선 인사에 길들지 않는 고개처럼


생의 절정이 흰 꽃이라면

초록은 대신 죽어도 좋을 이름


오후에 그친다는 비는 저녁 내내 긴

설거지를 멈추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숲」 전문같은 책          



한편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원왕생 원왕생/한 계절 앞서 달리는 편백나무 숲에서/그릴 사람 있다/사뢰고 싶습니다//, (「바다유리심장」 부분)”라는 표현처럼 인간의 윤회를 주제로 한 시편들이 많다. “죽음 이후에 표정은 어디에 고여 흐, (「미투리」 부분)”르고, “언제부터 우린 읽지 않고 펼쳐 두기만 하는 페이지가 되었, (「우리도 소풍일까」 부분)”는지, “꽃은 다음 生 도 꽃이라는 걸, (「외출」 부분)” 아는지 독자들 몫으로 남겨 놓은 김효선의 질문은 시집에서 예기치 못한 긴장감을 생성하고 유지한다. 시인 고유의 감각이 바로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런 이유로 그의 이번 시집은 ‘물의 언어로 된 경전’처럼 읽힌다. 평론가 장영우는 윤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한 바 있다.



우주의 창조가 절대적이고도 일회적인 것이라는 서구 기독교의 창조론과 달리,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소멸이 간단없이 계속된다고 믿는다. 그러한 믿음의 기저에 윤회론이 자리하고 있다. 윤회론은 간단히 말해, 전생의 행위가 이생의 삶을 결정하고 이생의 행위가 내생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업(業, karma)’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이 업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 과정은 반드시 ‘선업선과(善業善果)’ ‘악업악과(惡業惡果)’의 형태를 띤다. 흔히 업을 ‘인과응보’니 ‘업보’니 하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장영우현대소설에 나타난 불교적 주제」 부분불교평론》 2017년 3월 2일자          



“다시, 봄을 쓴다. 연두가 오고 있다. 쓴맛을 사랑한다.”고 소회를 밝히는 시인. 슬프도록 찬란한 물의 언어에 의지해 망망한 고해를 항해하는 중인 그가 선보일 궁극의 세계는 무엇일까. “서서 울어야 할 때(「서서 울어야 할 때가 온다면」 부분)”는 도래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손끝에서 노래는 계속될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번지는 중인 세계의 슬픔을 온몸으로 견디는 당신에게 김효선 시인의 시집을 권한다.



넓은 이마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

이마가 좁은 사람은 미끄러지기 좋은


기억은 통조림 같은 것

가라앉은 입술을 꺼내기 전에는

은밀한 둘레를 껴안는 의식을 치를 것

수많은 날들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쉽게 물러지는 복숭아처럼

여전히 사랑은 경전에서 멀어진

이단


재미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거울은 재미없는 사람을 먼저 데려간다

웃는 나를 본다 울고 싶은데


사라졌던 계절이 이마 한가운데

자운영으로 그렇게 서로에게 몰려 있다

나는 좀 모자라서 발목을 빠뜨린다

입술을 꺼내어 기어이 덫을 놓는


죽어야 끝나는 관계는 어떤 목숨의 종교일까


물기를 훔친 꽃들은

마음이 없는 곳으로만 고개를 꺾는다

깻잎장아찌를 떼어 주거나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사소함이 이마의 전부를 가릴 만큼


웅덩이에 고인 사랑, 하늘의 낯빛이 맑다

그래, 용서할게



* 제주도 서귀포시 호근동에 위치한 한반도 최대의 마르형 분화구.




김효선하논*의 시간」 전문어느 악기의 고백(문학수첩, 2020)          






■ 1987년 광주 출생.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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