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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 Nov 20. 2018

농부의 하루

흑백 망상

여명이다. 흑암과 혼돈의 수면 위로 신령한 바람이 분다. 농부는 일어났다. 


때로, 어느 이웃집 닭장 속에서 홰를 치는 소리에 눈을 뜨기도 하지만, 농부는 매일 스스로 일어난다. 농부의 몸은 몇 시간 동안 '잠'이라는 활동을 마치고, 이제 깨어나 활동하는 주간 근무조가 교대를 하러 온 것이다. 세포와 기관 속에서 교대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농부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 5시나 6시 사이일 것이다. 어느 날은 햇빛이 뿌연 수증기처럼 흩어지는 광경이고, 또 어느 날은 흰 달이 흙같은 어둠 위로 시치미를 떼고 있다. 농부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자기 전에 길어놓았던 주전자의 물을 마신다. 


각막과 시신경의 교감이 청명하지 않다. 그러나 재촉할 필요 없다. 세계가 원래의 빛을 점점 찾아가듯, 농부의 감각들도 점점 팽팽해질 것이다. 어젯 밤에 문 앞에 세워둔 쟁기를 든다. 그리고 아직 잠이 든 집을 등지고 재 너머, 삼 밭으로 향한다. 


말 없이 밭을 갈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물이 피어오르는 산, 한 마리 백로가 골짜기 아래로 날개를 편 채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그리고 또 농부는 밭을 간다. 


햇빛이 점점 피부를 때리기 시작한다. 뱃 속에서 식도를 잡아당겨 혀가 말라간다. 그는 곡식과 채소, 그리고 몇 가지 양념을 버무려 한 끼니를 때운다. 해는 번들거리고 있고, 문득 바라본 밭 이랑은 길고도 잦다. 그의 쟁기질이 점차 느려진다. 오후 반나절 쯤에 그는 집으로 향한다. 


천상에서 농부는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바로 그때, 나는 사무실 책상에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다. 판매된 제품의 부속품과 관련한 질문이다. 아무래도 그 중의 몇 개는 무상으로 교체해주어야 하고, 몇 개는 유상으로 다시 판매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내용을 적어서 문서를 만들어야 겠다. 문서는 팁장과 임원, 그리고 사장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부속품의 모델명과 규격,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을 확인하기 위해 등록된 정보 목록에서 검색을 해야 한다. 어떤 품목은 금방 찾아진다. 어떤 품목은 규격이나 모델명이 조금씩 제각각이다. 이것은 생산 담당자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해봐야 한다. 


생산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본다. 공장 내부의 소음 때문인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무실을 나가, 공장으로 내려가 본다. 어떤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담당자를 불러 해당 제품의 규격과 모델에 물어본다. 담당자는 그런 것도 일일히 확인해줘야 하는게 귀찮다는 듯이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공장에서 사무실로 돌아가다 말고, 잠시 건물 밖으로 나간다. 예닐곱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고 그 옆으로 벤치가 놓여있다. 벤치 옆 재털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고, 농도 짙은 냄새를 온 마당에 풍기고 있다. 잠시 핸드폰을 열어 카카오톡을 확인하기도 하고, 페이스북을 열어보기도 한다. 


다섯 시 이십 분. 조금씩 태양이 기세를 잃어간다. 나는 문득 편지를 쓰고 싶다. "나는 이렇게 하루를 보냈어." 라고. 하지만, 너무 대단하지 않기에, 이 편지는 영원히 쓰여지지 않을 것이다. 나인 투 식스의 심포니, 빌딩 앞 대로에는 귀가를 서두른 붉은 빛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찬송 소리를 낸다.


지상에서 농부는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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