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한 노래

노래가 지나간 자리, 몸은 오래 기억했다

by 고요숨결






어버이날을 앞둔 오월이었다.
언니와 나는 백화점을 오가며 부모님 선물을 고르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식당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하는 노래자랑이었다. 노래를 부르면 여러 선물들을 준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을

한창 연습하고 있었다. 그 노래로 참가 신청을 했다. 예선에서 준비한 노래를 불렀고 뜻밖에도 본선에 올랐다. 본선에서도 같은 노래를 다시 부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본선은 준비한 노래가 아니라 뽑은 노래를 불러야 했다. 뽑힌 노래는 김수일의 〈아파트〉였다.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불러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무대 한가운데에 섰다.

그날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박자는 자꾸 어긋났고 가사는 중간중간 사라졌다. 머리가 하얘졌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마치 소리가 멀어지듯 몸이 천천히 얼어붙었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도 떼기 어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 나보다 듣는 사람들이 더 민망했을 것이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언니는 웃으며 나를 놀렸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선물도 받지 못한 채 웃픈 에피소드로 남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몸은 그날을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발표, 소개, 무대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숨이 얕아지고 몸이 경직되었다.
머리로는 안다. 그날의 노래가
인생을 좌우할 일은 아니었다는 걸.

하지만 몸은 그 무대를 위험한 장소로 기억했다 다만 그 용기가
안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몸에 남았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TRE를 통해 배운 것은 몸은 말보다 먼저 경험으로 안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괜찮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보다 안전한 상태에서 몸이 스스로 긴장을
풀어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일이다
무대에서 얼어붙었던 감각들은 시간이 지나서야 조심스러운 떨림으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떨림은 망신의 흔적이 아니라
그동안 붙잡고 있던 긴장이
이제는 풀려도 된다는 신호였다.

노래자랑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나를 멈추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몸이 얼마나 성실하게 나를 지켜왔는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노래는 끝났지만

몸은 그날을 통해 조금 늦게
안전해지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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