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를 안 먹어 본 사람이 고기 먹는 방법
형법에는 위법성 조각 사유라는 개념이 있다. 위법, 즉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음에도 정당화되는 특정한 사유를 의미한다. 가령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 배에 구멍을 내는 경우 일반적으로는 상해에 해당되지만 수술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하게 되므로 이는 피해자(환자)가 승낙한 것으로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구(自救) 행위라는 개념도 있는데, 뜻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돈을 떼먹은 사기꾼을 미행하는데 이 녀석이 공항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경찰은 멀고 나는 가까운 이 상황에서 내가 공권력이 아니니까 손 놓고 있으면 곧 비행기를 타고 도망갈지 모른다. 따라서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사기꾼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출국을 저지하는 것은 자구행위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세상에는 수많은 피해자가 있지만 때로는 스스로 권리를 보전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피해를 입은 것은 딱하지만 공권력이나 구제심판기관은 스스로 모든 사건사고를 다 알 수는 없기에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정당하게 알리려는 마음을 먹는 과정도 자구행위(물론 형법상의 개념과는 다르지만)라고 생각해보았다.
사표를 쓴 선생님은 뭘 할까요?(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조력자의 등장으로 아직 내가 근무했던 기관과의 볼일이 남아있음을 인지하게 된 나는 내가 올해 초 상치했던 직업탐구의 교과서 내용을 떠올렸다.
"직장에서의 부당노동행위는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보통 재직 중에 찌르는 경우는 잘 없으므로 퇴사 후 3개월 이내)에 지방노동위원회를 통하여 그 사안을 제출할 수 있다."
그렇게 퇴사한 지 한 달 반이 지나 10월 중후반에 나는 노동위원회를 찾아갔다. 그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이 뭐였냐면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가?'였다.
나는 만나는 모습만큼 헤어지는 모습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돌아선 사람과 언제 어느 길에서 어떤 식으로 재회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리고 상대방의 태도가 악의적이지 않은 실수에 대해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적을 만들려 하지 않는 성격인데... 지금 노동위원회에 접수하러 가는 것은 내가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행위임에도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내가 내 권리를 찾으려는 행동인데 한편으론 마음이 불편해야 하는지 이 상황을 초래한 학교 관리자들이 미웠다.
노동위원회에 가면 이런 양식을 작성해야 한다. 명칭은 [차별적 처우 시정 신청서]이며, 작성에는 주의사항이 필요하다. 가장 힘든 부분은 "잠정적 비교대상자"를 작성해야 하는 것인데 말 그대로 내가 어떤 측면에서 차별받았다면 차별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지 비교대상을 적어야 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동료 한 명을 적어야 하는 것.
이게 왜 힘드냐면 저기에 이름 적힐 정규직 선생님은 나랑 원한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리자의 잘못된 경영, 업무적인 부분으로 퇴사를 결심했는데 막상 이름을 적어야 하는 사람은 최대한 나랑 업무가 비슷한 사람을 적어야 하기에 이것이 힘든 점이다.
'그냥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 이름 적으면 안 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장, 교감, 부장의 이름을 적었다간 직급이 다르다고 꼬투리 잡힐 수 있다. 나랑 근무시간이 겹치지 않은 주간교사의 이름을 적으면 포지션이 다르다고 명분이 잡힐지 모른다. 결국 거르고 걸러 나와 사이가 나쁜 적도 없었던 한 선생님의 이름을 적어버렸다.
여기서 또 끝이 아닌데, 혹시라도 차별적 처우 시정을 요청하러 가시는 분들은 잘 알아두시길 바란다. 내가 차별받은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내가 못 받은 정액급식비의 경우 받았던 사람들은 매월 얼마를 받았는지 확실히 금액을 알고 있었기에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여금은 정규직은 어느 기준에 의하여 지급되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마냥 촉으로 찌르려면 차액을 모르기에 난감해진다.
"그러면 정규직의 정확한 급여 세부항목을 모르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작성을 못하나요?"라고 물었더니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적당히 때려 쓰면 조사가 시작되면서 맞춰질지도... 허나 나는 당장에 그런 요령을 생각하지 못하고 결국 밥값만 신청하기로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