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와라즈에 온 여행객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 있다.
바로 사파이어 원석이 녹은 듯한 69 호수와 안데스의 선물이라 불리는 산타크루즈산이다. 사실 와라즈 자체로만 보자면 사막 한가운데 있는 듯한 휑한 마을로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69 호수와 산타크루즈 산은 무척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트레킹을 하게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설레었다.
베네수엘라의 로라이마 트레킹 이후 미처 알지 못했던 적성을 찾고는 앞으로 트레킹은 단 하나도 빼먹지 않겠다며 노스페이스 트레킹화도 큰 맘먹고 구입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트레킹을 할 기회가 전혀 없어 배낭에 무겁게 짊어지고 다닐 수밖에 없어 와라즈에 도착하기 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로라이마 산에서는 5박 6일의 대장정을 뭣도 모른 탓에 러닝화로 겨우 버텼지만 앞으로 내가 오를 산타크루즈, 토레스 델 파이네, 피츠로이는 모두 설산이기 때문에 동상에 걸려 고생하지 않으려면 트레킹화가 필수이다.
산타크루즈 트레킹은 2박 3일 또는 3박 4일로 진행되는 꽤 긴 코스이다. 69 호수는 비록 캠핑은 하지 않지만 산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왕복 6시간의 트레킹 코스를 이동해야 한다. 이틀 연달아 트레킹을 할지 하루 정도 텀을 둘 지 잠깐 고민했으나 로라이마 트레킹을 떠올리며 '이쯤이야'라고 의기양양해졌다. 생각했다.
침보테 터미널에서 6시간 버스를 달려 와라즈에 도착했다. 남미 여행 두 달 차가 넘어가니 6시간 '밖에' 안 걸린다며 기뻐할 정도가 되었다.
이곳의 호스텔들은 여행객들이 많이 가는 69 호수와 산타크루즈 트레킹 가이드도 겸하여 따로 여행사를 찾아 나서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호스텔에 들어가니 매니저가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정해진 코스인 듯 나를 호스텔 주인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자 교실 크기의 커다란 방 끝에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캐주얼한 복장의 30대의 젊은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밝은 미소로 악수를 청했다. 그는 능숙하게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 보이며 투어 루트와 그에 따른 옵션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산타크루즈는 소문대로 멋진지 궁금하다고 물어보자 친절히 답해주던 주인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요즘에는 산타크루즈 트레킹은 별로 좋지 않아요. 사람이 너무 많이 가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많이 더러워졌죠. 대신 낄까우안카라는 곳을 추천하고 싶어요. 2박 3일 코스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트레킹 중 하나이고 사람도 별로 없고 아주 깨끗하답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잠깐 고민했으나 이내 곧 "흠.. 그럼 그렇게 하죠."라고 답해버렸다.
이곳에 대해서는 내가 그 보다 아는 것이 별로 없기도 하고 (있어봤자 책이나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일 뿐이다) 계획대로 하기보다는 흐름에 맡겨보자라는 마인드가 있었기에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기를 당하기 딱 좋은 타입 인지도 모른다. 트레킹을 하면 되는 거니까 굳이 산타크루즈를 고집할 이유는 없지 않나?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나의 선택에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아차'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혹시 트레킹을 한 적이 있나요?"
"6 days 트레킹을 해봤어요."
나는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우 그럼 문제없겠네요. 이곳은 고산지대라 숨 쉬는 게 힘들 수 있어 조심해야 해요. 또 산 위는 아주 추워서 반드시 따뜻하게 입고 가야 한답니다."
로라이마에서는 긴 여정으로 지치긴 했으나 날씨가 지나치게 덥거나 추워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와라즈는 산 아래인 이곳도 무척 쌀쌀하기에 위쪽은 몇 배 이상으로 추울 거다. 하지만 탁 트인 골짜기와 설산을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트레킹은 너무나도 멋질 것이라 생각하니 그 역시 '이쯤이야 견뎌야지'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된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여행 친구를 사귀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좁은 방을 함께 쓰며 오래된 친구처럼 하하호호 밤늦도록 수다를 떨고, 함께 으쌰 으쌰 힘내자며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은 이런 것들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외향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어느 호스텔이든 홀로 지낸 시간보다는 새로운 친구들에 둘러싸여 복작복작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먼저 다가와준 적극적인 친구들 덕분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옆자리를 채워주었다. 이곳에서도 또다시 나는 운 좋게 긴 여정을 함께 해줄 친구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하나, 캐나다에서 왔고 올해 스무한 살이다. 그녀는 나보다 어리지만 배낭여행에 있어서는 베테랑이다. 이제껏 혼자 여행 온 여자 중에 나보다 어린 사람은 없었기에 속으로 무척 놀랐다. 키가 큰 그녀는 언뜻 보기에 성숙해 보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직 앳된 얼굴이 많이 남아 있어 '혼자 여행하는 게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혼자 소파에 앉아 69 호수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안녕? 너도 69 호수로 가?"
"응."
"그럼 같이 갈래?"
"좋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짝이 되었다.
하나와 통성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지프차가 호스텔 앞에 도착했다. 다들 어디에 있었는지 열 명 정도의 무리가 한 차에 올라탔다. 대부분이 동료가 있어 만약 하나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면 민망할 정도로 들뜬 분위기의 차 안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한 청년만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하나는 나에게 '여행을 해보니까 사람들이 보통 이스라엘 사람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라며 귀띔해주었다. 그 이유가 시끄럽고 무례한 사람이 많다는 거였다. '저 사람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 역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다들 원래 알던 사이인지 하나와 나처럼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나 역시 하나와 딱 붙어 나란히 앉아있는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에 알게 된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지에서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혼자 남미까지 온 여행자라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커다란 공통부분을 나누었으니까.
남미까지 온 사람들은 옆 동네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대부분은). 그 무거운 발걸음 중 한 지점이 맞닿은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기에 충분하다. 버스가 하루만 늦게 도착하더라도 혹은 일찍 도착하더라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라는 것, 다른 호스텔에 묵었더라면, 만약 하나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더라면, 한국사람은 시끄럽고 무례하다는 평이 있었더라면 등 경우의 수를 덧붙이자면 끝이 없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건 무의미해지는 거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만났고 같은 지점을 향하는 한 함께 가는 동료가 된다.
안데스 산맥은 지구상에서 가장 길게 뻗어있는 산맥이다. 베네수엘라부터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7개국에 걸쳐 형성되어있다. 페루는 중앙 안데스에 속하는데 오늘은 69 호수를 내일은 낄까우안카를 트레킹 한다. 어쩌다 보니 낄카우안카까지 하나와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녀 역시 호스텔 주인의 꾐에 넘어간 게 틀림없다.
하늘은 푸르르고 하얀 구름이 여유롭게 두둥실 떠다닌다. 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날씨다. 한쪽에는 강이 졸졸졸 흐르며 말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심드렁한 표정으로 풀을 뜯어먹는다. 그러한 여유로운 정경에 왠지 나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가도 괜찮을 것만 같다.
하나와 나는 말수가 적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함께 보폭을 맞추며 호수까지 올라갔다. 이따금 서로의 안부를 물어봐주고 뒤돌아 위치를 확인하면서. 나란히 걸을 때도 있고 멀찍이 떨어졌을 때도 있지만 시야에서 벗어날 정도로 거리를 두진 않았다.
그렇게 산책하듯 천천히 산을 오르니 어느새 설산 사이에 자리 잡은 69 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는 사파이어를 녹여서 차갑게 식힌 듯 푸른빛과 녹색 빛이 그러데이션으로 촤르르 펼쳐졌다. 이곳에 몸을 푹 담그고 나오면 반짝반짝 빛날 것 같이 아름다웠고, 금방이라도 호수 수면 위로 낯선 생물체가 큰 소리를 내며 튀어나올 것 같이 신비롭기도 했다. 아주 유순한 거대 생명체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문득 오래전 호수 괴물이라고 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 뉴스가 생각났다. 누군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피규어로 사기를 친 것이다.
하지만 이 호수에서는 정말 그런 생물체 하나쯤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고 수줍음이 많은 생명체인 거지.
여행의 매일이 기억할 만큼 특별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이런 장기여행에서는 일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남미의 자연경관을 바라볼 때면 여행이 무척이나 특별해지고, 그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 역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멋진 순간들을 끊임없이 두 눈에 담고 싶어 진다.
낄카우안카 트레킹은 하루 휴식을 가지고 다음날 출발하는 일정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설명해 주었는데 까먹었을 수도) 이곳에 더 있어도 상관이 없어 수긍했다. 뭐든 너무 쉽게 수긍하는 게 아닐까 싶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간에 후지 여관 매니저 일을 시작하는 8월 1일까지 칼라파테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그 기간 내에는 자유롭게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와도 괜찮다.
주인장이 내일 함께 낄까우안카 트레킹을 함께 할 가이드를 소개해 주겠다며 하나와 나를 불러 세웠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성큼 다가와 친근하게 인사했다. 그의 표정과 말투는 아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주인장과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둘은 형제였다. 그는 자신이 가이드 겸 포터 역할을 할 거고 그의 삼촌이 포터 겸 요리사의 역할을 할 거라고 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커다란 가족 사업장이었다.
우리 말고 또 트레킹을 신청한 사람이 있냐고 묻자 69 호수 트레킹을 함께 했던 네덜란드 남자 둘밖에 없다고 했다. 총 네 사람으로 2박 3일 일정에 비해 아주 단출한 멤버가 구성되었다. 69 호수에 갔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다들 산타크루즈 트레킹에 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낄까우안카 트레킹이 주인장이 말한 것처럼 매력적인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두 청년 라니요와 구디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남성 평균 키가 180이 넘는 나라에서 온 만큼 키가 컸다. 두 사람은 썩 좋지 않은 첫인상을 남겼는데 그 이유는 69 호수 트레킹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들 지쳐서 기진맥진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두 사람만 신이 나서 시끄럽게 떠들어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탓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산을 오르내릴 때 가사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노래를 끊임없이 불러댔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멤버를 바꿀 수 없으니 이 역시 수긍할 수밖에.
사람의 실루엣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어둑어둑한 새벽 6시, 호스텔 앞에서 트레킹 멤버가 모두 모였다. 지프차를 타고 황량한 마을을 나와 산 초입에 다다를 때쯤에서야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고 어느새 눈앞에는 안데스 산맥이 놓여있었다. 우리에게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들며 환영하는 듯했다. 쌀쌀한 공기가 볼을 스쳤지만 오히려 정신이 들게 했다. 새로운 트레킹을 시작한다는 게 실감되었다.
먼저 연둣빛 드넓은 초원을 따라 걸었다. 시야가 확 트이는 초원 끝에는 머리가 하얀 설산이 장엄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룩소와 커다란 뿔은 가진 검은 소가 듬성듬성 거리를 유지하며 굼뜨게 움직였고 작은 시내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길게 늘어져 흘러가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라색 꽃밭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 평화로운 광경을 두 눈에 담는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다.
경사로에 진입하자 설산이 더욱 잘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쭉 내밀어보니 저 먼 곳까지 굽이굽이 안데스 산맥의 설산이 보였다. 저 너머에는 초록빛 호수가 고여있다. 서늘한 푸른 하늘에 대비되는 강렬한 태양이 숨을 곳 없는 머리 위 그대로 빛을 내리쬔다. 평소라면 무척 거슬리고 짜증스러웠을 텐데 쌀쌀한 공기 덕에 오히려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얀 설산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난다.
산을 오르면서 점차 숨이 가빠왔지만 고산병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 고산병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 힘든 지경까지 와서 산소통에 의지하거나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한다.
쉬는 시간에는 고산병 예방을 위해 따뜻한 코카잎차를 마셨다. 널리 알려져 있듯 코카잎에는 마약성분이 있지만 그래도 잎 채로 먹는 건 심각한 중독 증세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 것일 뿐이니 더욱 문제는 없다. 그래도 코카잎이라고 해서 무척 기대했는데 보통의 차와 같은 심심한 맛이었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씩 마시니 몸이 스르르 녹는다. 그러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본다. 시야 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조화롭고 완벽했다. 그리고 모든 게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자 로라이마를 오를 때의 오만한 마음과 욕심이 너무나도 무용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목적지에만 오로지 몰두하여 이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어쩌면 그때는 그런 게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이 참을 수 없이 밀려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나도 이곳의 한 부분이 되어 천천히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반에 다다라서야 내 마음은 드디어 여유를 되찾았는지도 모른다.
이곳의 밤은 빛 한줄기 없이 어두컴컴하다. 그리고 온몸이 꽁꽁 얼 것 같이 춥다(그렇다고 해도 베네수엘라 버스 안 보다는 덜 춥다). 하나와 같은 텐트를 썼는데 우리 둘은 너무 춥다는 말을 반복하며 침낭 속에 쏙 들어가 진동벨처럼 덜덜 떨었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혹시나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물론 그녀는 먼저 잠에 들었을 뿐이었지만. 아침에 일어나자 텐트 주위로 새하얀 서리가 두텁게 껴있는 걸 보고는 우리가 유난스러웠던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라니요와 구디는 이상한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산을 내려갔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던 그들의 노래에 어느샌가 모두가 중독되어 따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그건 그들과 이 멋진 안데스 산맥 하늘 아래 보낸 시간이 소중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꽤 거슬리는 친구들이지만 리니요는 등산 스틱이 고정되지 않아 혼자 끙끙거릴 때 슬쩍 다가와 도와줬고 구디는 맛있는 사탕을 나눠주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도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참 단순한 것 같다.
드디어 평지에 다다르자 우리는 밝은 미소를 되찾았다. 뒤돌아 보니 거대한 계곡과 하얀 설산이 여전히 뜨거운 태양에 반사되어 멋진 모습을 뽐내고 있다. 더욱 돌아가는 발길이 아쉬워져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트레킹은 고생스럽고 힘들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마무리해도 뿌듯하고 기분 좋을 줄이야.
어쩐지 트레킹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마음이 휘몰아칠 때면, 그래서 나를 매섭게 밀어붙일 때면 코카잎차를 호호 불며 마시던 그때를 떠올려야지. 그러면 잠시 쉬어가는 나라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