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남미 배낭여행 노트 26화

라이킷 15 댓글 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독당근 Jul 31. 2022

혼자 하는 여행이 좋은 이유

피츠로이

기본적으로 배낭여행을 한다는 건 세련된 것과 거리가 먼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투박한 호스텔 도미토리에 묵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게 오히려 낭만이 되는 거다.

나는 배낭여행자라는 신분에서 누릴 수 있는 건 뭐든 누리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은 많지만 20대 배낭여행자로서 느낄 수 있는 건 이때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1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반박할 수 없다. 아무리 청년 나이가 30대 후반으로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워낙 꼼꼼한 성격이 아닌지라 여행 중 숙소는 지금 머무는 숙소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세 군데 정도만 인터넷으로 봐 두었다가 도착하면 하나씩 직접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식으로 골랐다. 내가 찾는 숙소는 주로 4 beds나 6 beds의 도미토리여서 잘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며 떠돌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휴양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니 숙소의 퀄리티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지어진 지 수십 년은 된 것처럼 우중충하고 화장실이 노후되었다고 해도 저렴하고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자고 일어나니 다리에 베드 버그에 물린 자국이 잔뜩 있었다는 곳은 피하겠지만.

가장 걱정되었던 것이 과연 여러 사람이 뒤섞여 지내는 도미토리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친구를 사귀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한 방을 쓰며 오래된 친구처럼 하하호호 밤늦도록 수다를 떨고, 다음날 일어나 오늘 하루도 힘내자며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은 그런 외향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독한 여행을 할 거라 생각했고 그래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도미토리는 시끌벅적하거나 북적거리기보다는 늘 평온하고 안락했다. 고단한 여정을 마무리한 지친 여행자들은 도미토리에 조용히 들어와 깊은 잠에 빠지거나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을 정리했다. 물론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공유 공간에 나가면 활기가 넘치고 즐거운 대화가 오갔지만 말이다.

그리고 의외로 어느 호스텔이든 홀로 외롭게 지낸 시간보다는 새로운 친구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먼저 다가와준 적극적인 친구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을 섞게 되었다. "지금 광장으로 갈 건데 같이 갈래?", "추천받은 식당이 있는데 같이 점심 먹을래?" 이런 식이다. 고독한 여행을 즐길 거라던 나의 생각은 아주 오만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꼽자면 '혼자'여서가 아닐까? 만약 일행과 함께 여행을 했더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다가갈 이유 역시 없었을지도 모른다. 혼자였기에 상대 쪽이 혼자든 여럿이든 나에게 쉽게 말을 걸어왔고 나 역시 반갑게 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한눈에 보기에도 위협적이지 않고 공격성이 전혀 없어 보이기에 나와 엮인다고 해서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을 테다.

남미에 홀로 덩그러니 있는 나를 보며 현지인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같은 입장의 여행자들 역시 젊은 여성이 혼자 여행한다는 것 자체에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혼자라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거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혼자 있는 게 안쓰러워서 다가왔을 수도 있겠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행 후반이 돼서야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갈 수 있었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그 외로움은 어마어마하게 증폭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러면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라게 되고 결국 용기를 낼 수밖에 없다.

'나는 혼자 이곳에 왔고 당신 (혹은 당신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나누고 싶어요'라는 것을 은연중에 엄청나게 어필하면서 말이다. 어쩜 그토록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직진할 수 있었던 건 내 나름대로의 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와 같은 여행자라면, 그것도 남미까지 온 사람이라면 아주 중요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그 중요한 무언가를 지금이 아니면, 이 사람이 아니면 나누기 힘들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던게 분명하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직감은 딱맞아떨어졌다.

홀로 남미 여행의 길고 쓸쓸한 시간을 버텼다면 어땠을까? 가득 차고 흘러넘치는 혼자만의 시간을 겨우 채우고 나면 나머지 빈 공간은 어쩔 도리 없이 공허해졌을 테다. 그랬더라면 내 여행이 이토록 기억에 남을 리 없다.

그들과 함께 나눴던 중요한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도 혼자였기에,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뒀기에, 그 공간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노트북을 켜면 잠금 화면에 반갑고 낯익은 사진이 뜬다. 바로 세계 3대 미봉하고 불리는 피츠로이 산.

새하얀 눈과 구름, 거대한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강, 빙하가 녹아서 이루어진 호수. 모든 자연물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그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여러 개의 봉우리는 누군가가 뽐내기 위해 높이 세운 동상처럼 보인다.

파타고나아의 아름다운 대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던 피츠로이 트레킹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바릴로체 1004 호스텔에서 만난 강릉에서 온 세 명의 오빠들과 함께 피츠로이가 있는 엘찬튼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대화도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뜸 "오늘 엘찬튼에 갈 때 따라가도 되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들은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여행을 하다 보니 얼굴이 꽤나 두꺼워졌으나 그럼에도 내향적인 내가 입을 떼기 쉬웠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게 된 것은 혼자 산을 오를 자신도 없거니와(게다가 눈이 가득 덮인 산을) 여행을 통해 얻은 교훈 중 하나는 힘든 여정일수록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거다.

누군가가 함께함으로써 이곳은 낯설고 무서운 곳에서 안전한 장소가 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눈 마주침과 짧은 응원의 말에 고통은 가벼워지고 더욱 힘주어 발을 내딛을 수 있다.

게다가 잠깐 본 사람들이지만 이 세 사람의 분위기가 따뜻하고 좋아 보여 그에 합류하고 싶었다. 그런 따뜻함에 이끌리고 애써 찾는 건 여행 막바지가 되어 마음이 약해진 것도 한몫한 것 같다.

버스에는 우리 네 사람 외에 몇 사람 타지 않아 텅텅 비어 있었고 아주 고요했다. 터미널까지 걸어가는 길도 또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너무나도 조용하고 어색해서 '괜히 왔나?'라는 생각이 수십 번은 더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창밖에는 황량하고 쌀쌀한 경치만이 쭈욱 이어졌다. 아르헨티나는 한국 정반대 남반구에 있어 7월이지만 계절은 겨울이다.

하얀 눈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큰 흔들림 없이 매끄럽게 잘 달려가던 버스가 조금씩 움직임이 더뎌지더니 갑자기 멈추어 섰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려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스페인어로 무어라 말씀하셨다. 다시 기사 아저씨는 운전석에 앉아 출발하나 싶더니 얼마 안 가 생뚱맞게 도로가에 서 있는 작은 호텔 겸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 알고 보니 버스에 문제가 생겨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해서  여기서 기다려라는 말이었다.

어쩔 도리 없이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야 했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더 아담한 크기의 레스토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손님은 아무도 없어 프라이빗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금방 올 것 같던 기사님은 소식이 없고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버렸다. 그 덕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여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터놓고 하게 되었다. 여기는 지구 반대편, 바깥의 눈보라는 점점 강해지고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한국인 네 사람만 모여 있으니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다행히 버스기사 아저씨가 다시 돌아오셨으나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늦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엘찬튼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리고 나서야 오빠 한 분이 간식을 가득 담은 봉지를 이전 버스에 두고 내린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굉장히 자책을 했지만 다른 두 사람이 괜찮다며 위로해주었다. 다행히 근처에 문을 연 슈퍼가 있어서 우리는 내일 트레킹을 하며 먹을 간식을 산 후에 호스텔을 찾아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저녁을 먹지 못한 우리는 호스텔 내 레스토랑에서 바로 식사를 주문해서 허기를 채우고 다음날 일찍이 피츠로이 트레킹을 하기 위해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7시 반부터 아침식사가 가능하다고 하여 7시에  일어나 트래킹을 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시간에 맞추어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게 스크램블 에그 밖에 없어 든든히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게다가 믿었던 런치박스가 안된다고 하자 어제 조금 사둔 과자로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호스텔을 나서자 찬 바람이 온몸을 덮쳐 페루에서 산 털모자를 더욱 단단히 고쳐 써야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개 두 마리가 우리를 쫓아왔다. 우리는 산까지 개가 따라오면 힘들어할 것 같아서 '훠이~ 훠이~' 하며 쫓아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따라왔다. 결국 피츠로이 산 초입부에서 검은 털의 개는 따라오기를 포기했고 흰 개는 우리를 끝까지 따라왔다. 개의 이름을 알 리 없는 우리는 그냥 '마리오'라고 부르기로 했다. 커다란 덩치에 새하얀 털을 가진 마리오는 엉덩이 부분 쪽만 동그란 모양으로 갈색 털이 나 있었는데 왠지 이 설산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8시가 되었음에도 한밤중인 것 마냥 어두컴컴했다. 바람도 많이 불어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는 체력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뒤처지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추위까지 더해지니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럼에도 먼저 쉬자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건 괜히 따라와 방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고(물론 그러지 않겠지만) 약해 보이는 건 더더욱 싫었다.

좁은 산길을 핸드폰 플래시 불빛에 의존하여 한 줄로 천천히 걸어갔다. 시야가 멀리까지 닿지 않아 조심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수밖에 없는데 마리오는 눈이 차가워서인지 신이 난 건지 혀를 내밀며 폴짝폴짝 뛰며 우리를 잘도 쫓아왔다. 우리는 마리오가 도중에 힘이 빠져버릴까 걱정이 되어 마리오를 돌려보내려 다시 애썼으나 결코 단념시킬 수 없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시야가 밝아지자 으스스했던 겨울 산이 서서히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하얀 눈이 산을 온통 덮고 있었고 햇살이 닿자 반짝이며 예쁘게 빛났다. 꽁꽁 얼었던 구름과 시냇물도 천천히 흘러갔고 헐벗은 나무도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완전히 새로운 장소에 온 기분이 들자 다시금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간 덕에 일찍 피츠로이 봉우리 전망대(mirador)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서는 액자 틀에 씌운 듯 피츠로이 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구름인지 안개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 희뿌연 덩어리 때문에 그 모습을 온전히 보기 어려웠다. 피츠로이 봉우리는 태양이 비추면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서 캠핑까지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인데 우리는 차마 캠핑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구름 혹은 안개가 걷힌 완전한 봉우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봉우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란히 세워져 있는 여러 개의 봉우리들은 성난 맹수의 이빨 같아 보이기도 하고 신화 속의 늠름한 영웅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화롭고 고요한 산속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누군가 먼저 잠시 쉬다가 출발하면 될 것 같다고 하여  어제 슈퍼에서 샀던 간식을 꺼내려는데 오빠들이 내 것도 하나  샀다며 초콜릿바 하나를 불쑥 건네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놀라고 감동을 받음과 동시에 나도 센스 있게 간식을 더 살걸 후회가 되었다. 여행에서는 작은 것도 쉽게 감동을 받게 된다. 아니 작은 게 결코 작은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여 끝까지 오르지 못할걸 알지만 바로 돌아서 내려가기는 아쉬워져 갈 수 있는데 까지 더 가보기로 했다. 눈이 엄청나게 쌓여 발이 푹푹 들어가 넘어질 뻔하고 또 신발에도 계속 눈이 들어가 찝찝한 상태가 되었다. 몇 번 털어 내다가 체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동상에 걸리지 않을까 살짝 걱정되었다. 만약 파타고니아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여름인 12-3월에 와야겠다며 굳게 다짐했다.

결국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는 rio blanco(하얀 강)였다. 고생해서 겨우 도착했지만 물이 콸콸 흐를 거라 기대했던 강이 꽁꽁 얼어 쪼르르 약하게 흘러내려 실망스러웠다. 더 이상 올라가다간 위험할 거라는 판단에 여기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내려가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런치박스의 부재로 점심이라기엔 상당히 허술한 스낵을 꺼내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따라온 마리오가 장하여 얼마 없는 간식이지만 나누어 주었다.

하산을 하면서 산을 오를 때는 어두워서 미처 볼 수 없었던 카프리 호수를 만났다. 하얗게 얼어있는 호수와 산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절경이었다. 날이 따뜻했더라면 푸른 호수와 초록빛 산등성이가 어우러져 더 멋졌을 텐데 아쉬움이 생겼다. 늘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장소에 안착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조금 더 내려가자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부엘타스 강 줄기와 협곡이 나타났다. 바다나 강이 아닌 육지에서 시야가 뻥 뚫려 저 멀리 있는 지평선을 본 게 얼마만인지. 강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굽이굽이 시야가 더 이상 닿지 않는 산골짜기 사이로 흘러간다.

어둠 속 눈길을 비틀거리며 고군분투하며 나아가고 있을 때 이런 멋진 장면이 바로 옆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찬란히 내리쬐는 햇빛 아래 빙하의 푸른빛을 간직한 강이 흐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너머에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거다.

불과 몇 개월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피츠로이의 멋진 경관을 이렇게 눈 앞에서 보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건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간 것들, 그리고 도달하지 못해 볼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가득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생은 너무나도 짧고 모든 걸 성취하기엔 쉽지 않다. 앞으로 쉽게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건 발목까지 쌓인 눈 뿐만은 아니니까.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사진으로 추억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르는 이곳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할 수있다는 게 감사했다.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기억하는 존재가 나 말고 또 있다는게 큰 위안이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