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파테
어린 시절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아온 나임에도 이상하게도 아파트에 사는 내 모습이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이니 어쩌니저쩌니 그런 걸 떠나서라도 내가 앞으로 평생 살 곳은 아파트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들어가고 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전원주택을 예쁘게 꾸리는 사람들을 봐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상상하는 집을 머릿속에 그릴 수록 그 분위기나 느낌이 묘하게 어떤 곳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칼라파테, 후지 여관
쌀쌀한 겨울의 정경, 차분한 동네 사람들, 늑대처럼 커다란 길개들의 무리, 띄엄띄엄 적당한 거리로 떨어진 작은집들, 조금 더 걸어 나가면 플라밍고 떼들이 유유자적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고, 자동차를 타고 바다 가까이 달려가면 거대한 모레노 빙하를 마주 할 수 있는 칼라파테. 그 속에는 내가 정말 애정 하는 후지 여관이 있다.
'후지 여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 일본 후지산 아래 위치한 작고 오래된 여관을 상상하기 쉽다. 실제로 이 호스텔이 아르헨티나 남부 끝자락인 칼라파테에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상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무로 된 지붕에는 후지산이 그려져 있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고 벽면은 시멘트처럼 단단한 소재에 톤 다운된 녹색(쑥색) 페인트가 매끈하게 발려져 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인디핑크톤 페인트와 나무로 된 벽면이 적절히 어우러져 한층 따스함이 느껴진다. 낮은 원목 가구, 아기자기한 집기, 일본어로 된 책들을 보면 어느 일본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소박하고 단출한 집이다. 이쯤 되면 여기가 남미인지 일본인지 헷갈린다.
후지 여관에서 매니저일을 하게 된다는 게 확정된 순간 나의 여행은 이곳을 향하는 여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여행경비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우연히 찾게 된 일이었지만 모집 공고 끝자락의 한 글귀를 보자마자 이곳에서의 생활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칼라파테의 겨울은 길고 매우 평화롭습니다.봄부터 가을까지 사람들을 괴롭히는 혹한 바람도 없고요글을 쓰시는 분이거나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은 내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왠지 모를 신비함까지 느껴지는 후지 여관 사진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본 적도 없는 이곳을 그리워하며 남미를 떠돌았는지도 모른다. 103일간의 남미 배낭여행은 7월의 끝자락 후지 여관에 안착하면서 잠시 멈추었다.
후지 여관은 일본인 사장님과 한국인 사모님이 운영하고 있으며 매니저는 나 하나뿐이다. 4인 도미토리 두 개와 싱글룸 하나로 이루어진 작은 호스텔에서는 손이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다. 게다가 사장님과 사모님은 시내에서 '후지산'이라는 초밥집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낮시간 동안은 혼자 손님을 맞이하고 응대한다.
혼자라도 호스텔이 운영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찬바람 부는 7-8월의 아르헨티나는 비수기이고 이곳은 한국인과 일본인 여행자들의 입소문만으로 오는 곳이기에 손님이 우르르 몰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후지 여관 매니저의 주요 업무는 크게 청소, 손님 응대, 고양이 밥 주기 세 가지로 나뉜다. 손님에게 숙박비를 받거나 환전을 해주는 중요한 일은 일본어와 한국어 모두 능통하신 사모님이 도맡아 하시기에 나머지 잡다한 일은 내 몫이다. 그 대가로는 무료 숙박과 겨울을 날 수 있는 식사 세끼를 제공받는다. 떠돌이 여행자에게 아주 합리적인 편이다.
비록 도미토리 침대를 쓰긴 하나 100여 일 동안 낯선 사람들과 숙식을 함께 한터라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다. 오히려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침대는 커다란 창문이 바로 옆에 있어 칼라파테의 겨울 정경 구경할 수 있고, 머리맡에는 온열기구가 있어 24시간 따스함이 유지되었다. 여유로운 낮시간엔 두툼한 이불속에 쏙 들어가서 쉬거나, 깊은 밤 함께 방을 쓰는 손님들과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드는 소소한 일상을 보냈다.
식사로는 정갈한 밑반찬과 연어덮밥 같은 소소한 집밥을 사장님과 사모님과 함께 먹었는데 그 때문에 손님들에게 이 집의 딸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웃으면서 아니라고 손사래 쳤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이곳 후지 여관과 꼭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배낭여행을 하며 여러 숙소에서 묵어본 결과 호스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결'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손님이 떠나면 뽀송뽀송한 새 이불보와 이불로 바꾸고 베개 커버도 빳빳한 것으로 새로 갈아 끼운다. 화장실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항상 물기를 닦고 머리카락이 한올이라도 눈에 띌까 봐 늘 확인하고 곧바로 치운다.
청소를 부지런히 해서 호스텔이 깔끔하게 유지되기도 했지만 사실 손님이 적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매일 아침 청소를 하는 걸 아는 마음씨 좋은 여행자들이 숙소를 깔끔하게 이용해 주어 훨씬 덜 수고스러울 수 있었다. 아침에 한두 시간 청소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아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고민되었던 부분은 붙임성 있는 매니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낯선 곳에 도착하여 새로운 호스텔에 자리를 잡을 때 매니저가 먼저 다가와 인사해 주고 몇 마디라도 주고받게 되면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호스텔에 대한 인상도 아주 좋게 남게 된다. 낯선 장소에서 임시 보금자리 정도로 자연스레 격상된다.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인싸가 되어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게 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새로운 손님이 오면 어디서 왔는지, 일행이 있다면 어떤 관계인지, 얼마나 오래 여행을 했는지, 앞으로 여행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와 같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답변의 속도에 맞춰 나 역시 지금껏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 자연스레 오픈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서로의 처지를 충분히 알게 되어 한층 가까워진다.
어쩌다 성향이 잘 맞는 손님을 만나면(주로 혼자 온 여행자와) 같이 응접실이나 부엌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을 주변을 산책하고 같이 장을 봐서 요리를 해먹기도 한다. 나는 곧잘 손님들을 데리고 시내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는데,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성보다 이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다시 칼라파테에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먼 훗날 이들이 다시 이곳에 돌아온다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나를 기억해줄까?
후지 여관에 묵은 여행자의 다음 루트는 주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이다. 주로 새벽 3시에 우수아이아행 버스가 있어서 2시 반까지 뜬눈으로 함께 기다린다. 정이 든 다른 여행자들도 함께 기다려주어 그 시간이 외롭지 않다.
손님들의 체류기간은 주로 2-3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만남은 너무나도 짧다. 처음 어색한 인사로 맞이한 게 얼마 안 되었는데 이렇게 보내게 되는 마음은 매번 아쉬움으로 가득 찬다.
기약 없는 헤어짐에 넘쳐흐르는 아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Adios!"하고 더욱 밝게 인사해 보인다. 나는 마음속 깊숙이 그들의 여행에 행운을 빌어준다. 그리고 언젠가 어디에서든 다시 만날 수 있길 욕심내 본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업무는 마당냥이의 매끼 식사를 챙겨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후지 여관의 마당냥이는 총 11마리 대식구이다.
이들은 각자 마을을 배회하다가도 자유롭게 마당을 드나들며 생활한다. 고양이들은 내가 밥을 챙겨 주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한 뒤로는 찬장에 있는 사료에 손을 올리기만 해도 창문에 붙어 미야옹- 미야옹- 높은 하이톤의 소리를 내며 울어댄다. 그 모습이 꼬마들이 합창하는 것처럼 무척 귀여워 흐뭇한 표정으로 잠시 지켜보다가 바깥으로 나간다.
주방과 이어진 뒷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 널찍한 마당이 나온다. 바닥에 일열로 사료를 쭉- 부어주면 제각기 마당에서 뒹굴거리던 고양이들이 먹이 주위로 옹기종기 모인다. 찹찹- 맛있게 먹이를 먹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고양이들 사이에 가죽밖에 없는 고양이 빼빼는 무리에 끼지 못하고 늘 서성거린다. 그래서 다른 고양이들의 눈을 피해 빼빼를 저 멀리로 따로 데려와 먹이를 챙겨줄 수밖에 없다. 뒤늦게 사모님으로부터 빼빼가 이 오동통한 고양이들의 어미 고양이였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어찌나 놀랐는지.
"매니저님 -"이라는 호칭은 언제 들어도 어색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어는 책임감을 잔뜩 실어준다. 튀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 속에 모습을 감추려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고 싹싹한 사람으로 휘리릭 탈바꿈하게 만든다.
물론 내 선에서 싹싹한 것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싹싹함은 거리가 있을 거다. 어쩌면 싹싹함의 평균치에서 한참 못 미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잦은 후회나 자책을 하는 나조차 후지 여관 매니저 일 만큼은 미련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지 여관을 찾는 손님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쓸고 닦았고, 용기 내어 먼저 다가가 무언가 필요한 게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들을 보냈다.
응접실에 흐트러진 물건들을 착착 정리할 때, 새로운 손님이 왔을 때 슬그머니 다가가 매니저라고 소개할 때, 막 세탁을 마친 이불보를 탈탈 털어 뒷마당에 널 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는 나를 의식하게 되면 기분이 묘해졌다. 그럴 땐 이게 정말 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매니저 역할을 꽤나 잘해 내었고 적성에도 맞았다.
항상 떠나는 입장에서 떠나보내는 입장이 되니 기분이 이상하다. 이들이 떠나는 순간 후지 여관은 추억이 된다. 동시에 나 역시 겹겹이 쌓이는 추억 속 아주 작은 존재로 남아있겠지.
나는 어떤 매니저로 기억될까? 어느 날 문득 그들의 남미 여행을 떠올려 볼 때, 그러다 칼라파테의 후지 여관이 떠오른다면 '아, 거기 매니저분이 참 친절했었단 말이지'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는데, 역시나 이건 엄청나게 큰 욕심인 것 같다.
비록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후지 여관만은 따뜻하게 기억해주길 바라는 정도로만 욕심을 내야겠다.
매니저 공고문에 있던 글 그대로 칼라파테 겨울은 정말로 평화로웠다. 마을은 쓸쓸하고 황량했지만 후지 여관 안에서 만큼은 사람들과 고양이들 속에 섞여 포근하게 쉴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있을 수 있던걸 진심으로 행운으로 생각한다. 내가 손님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게 도운 게 아니라 오히려 오랜 배낭여행으로 지친 내 마음을 기대고 아주 푹 쉬었다고 생각할 만큼 감사했던 나날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나라는 사람이 호스텔 매니저 역할을 잘할 수 있었을까?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그건 후지 여관의 따스한 분위기와 꼭 맞는 사람이 되려 노력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번잡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게 힘들 때면 종종 생각한다. 후지 여관 매니저 시절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그렇게 된다면 밀려 들어오고 떠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기꺼이 반기고 배웅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삶은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는 깃털처럼 가볍고 평온할 수 있을 거다. 아마 그렇게 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겠지.
후지 여관 매니저 시절은 추운 겨울 포근한 침구에 몸을 맡기고 스르르 잠들었을 때 꿨을 법한 아주 달콤한 꿈처럼 느껴진다.
꿈결처럼 내 마음은 늘 후지 여관을 그리워하고 애정 하면서 그곳에 닿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