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지금 나이쯤이면 와인의 기호 정도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줄 알았지만 그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와인을 마실 일이 적기도 하고 확실히 애주가나 미식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그래도 어쩌다 약속이 생겨 와인을 마실 기회가 있다면 메뉴판을 스윽 훑어본 후 망설임 선택한다. '칠레산 화이트 와인'. 풍미나 바디감 이런 건 모르겠다. 무조건 '칠레산 화이트 와인'이다.
칠레에는 아르헨티나로 넘어가는 다리 정도로만 생각했고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던 터라 수도인 산티아고에만 잠시 머물렀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기는 아깝기도 해서 남미 여행 카페를 검색해보다 덜컥 콘차이토로 와이너리 투어를 신청했다. 칠레는 와인으로 유명한대다가 악마가 사는 와이너리라고 하니 문득 호기심이 생긴 거다.
어쩌다 악마가 사는 와인 창고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선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콘차이토로 와이너리의 와인 맛이 점차 유명해지면서 밤늦게 도둑들이 몰래 들어와 와인을 훔쳐가는 일이 무척 빈번해졌다고 한다. 주인장은 어떻게 하면 와인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다 번뜩이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는 어두운 밤 악마 복장을 하고 몰래 숨어있다가 도둑이 나타나면 놀라게 해서 쫓아내었고 그로 인해 소중한 와인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재치 있는 주인장은 사라지고 악마 형상의 붉은 그림자만 남아있게 되었는데 이 악마 문양이 와이너리의 심벌이 되었다.
투어 비용에는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 한 잔의 가격이 포함되어 있다. 가이드가 먼저 화이트 와인을 한잔씩 따라주었는데 별 기대 없이 받아 마신 첫 모금에 깜짝 놀라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비유가 아니라 머리 위로 폭죽이 터진 듯 정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안에 상큼하게 팡-하고 터지는 과일 향이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가이드가 한 잔 더 마시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말하라고 하여 단숨에 한 잔을 비운 나는 곧바로 와인잔을 내밀었다. '한국인은 정말 술을 좋아한다니까'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화이트 와인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와인에 대한 선택을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것도 나에게 남은 남미의 흔적 중 하나인 샘이다.
칠레산 화이트 와인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며 악마가 사는 와이너리에 대해서 떠올린다. 그러다가 '어라? 그때 와인잔을 기념으로 받았었는데 어떻게 했더라?' 곰곰이 생각한다. '아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라 아르헨티나까지 겨우 가져가서는 후지 여관 부엌에 두고 간 걸 기억해낸다.
후지여관 부엌 찬장은 여행자들이 두고 간 와인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스무 개는 족히 넘을 것이다. 아주 가지런하게 일렬로 세워져 반들반들 윤이 나는 와인잔들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다들 용케 아르헨티나까지는 가져왔구나' 하면서 말이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역시 와인은 프랑스지'라고 거들먹거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칠레산 화이트 와인을 다시 찾지 않을까?
내 마음은 항상 그곳을 기억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