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당근 Aug 27. 2022

이 삶의 끝엔 죽음이 있지만



 정열과 낭만의 도시라고 불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수도답게 볼거리들이 넘쳐난다.


 줄지어 서있는 건물과 발아래 바닥이 모두 알록달록 예쁘게 칠해진 라보카 구역과 대통령궁, 대성당,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동상이 있는 5 광장,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메인인 플로리다 거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하나인  아테네오 서점, 로맨틱한 탱고 무대를   있는 역사 깊은 카페 또르또니까지.

 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활기와 생명력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곳보다는 이상하게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레꼴레타 묘지가 가장 인상 게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구름   없는 깨끗한 하늘 아래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고요히 이곳을 감싼다. 바로 옆에 죽은 자가 누워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혼자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발을 들였다면 공동묘지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관리된 정원 혹은 조각공원 정도로만 여겼을지 모른다.


 칼라파테 공항에서 만난 뉴저지 목사님 덕에 지금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투어에 함께 합류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태워주신 것도 모자라 다음날 투어를 위해 픽업까지 해주시는 호의를 베풀어주셨다. 여행에서 만난 어른들은 젊은이에게 아낌없는 호의를 보내주신다. 따뜻한 응원의 눈길도 한 움큼 곁들여서. 여행 초반에는 이런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이건 내가 담아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흘러 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가벼워졌다.

 레꼴레타 묘지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 작가 등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묻힌 묘지이다. 이곳에 터를 얻으려면 수억 원의 돈이 든다고 하니 살아있을  이들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해볼  있다.


 작은 십자가들이 하늘을 향에 높이 솟아져 있고 곳곳에 천사상이 있는  보니 작은 교회나 성당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사후 저택이라는 글을  기억이 나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부자 동네를 축소해 놓은  일렬로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화려한 조각들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면 드레스 혹은 턱시도를 입은 귀족이 점잔빼며 나올 것처럼 하나같이 고풍스러웠다.  밤이 찾아오면 이곳의 영혼들이 하나둘씩 나와 그들만의 무도회를  것만 같다.


 간혹 어떤 묘지에는 주인의 흉상 혹은 전신상이 있기도 해서 그제야 바로 아래 이분의 시신이 놓여 있겠다는  실감이 났다. 그 순간 이곳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는  불경하게 느껴졌다. 묘지가 구경거리가 되는 아이러니라니.

 레콜레타 묘지는 면적이 커서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있어 길을 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사람이  끊기는 길목에  혼자 서있기 일쑤이다. 아무리 멋진 건축물 같다고 하더라도 홀로 무덤 사이 좁다란 길에 갇혀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 사이에 끼여있는 느낌이랄까? 죽음이 턱밑까지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모퉁이만 돌면 생명을 감지할  있음에도 얼어붙은 것처럼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그러면  그림자는  이상 타인의 것으로만 느낄  없다.


 

 이곳에  관광객의 90프로는 에비타 묘지를 보기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묘지 중에서 에비타 묘지를 찾는  쉽지는 않다. 하지만 빙글빙글 이곳을 헤매다  좋게  구역으로 들어선다면 단박에 에비타의 묘지를 알아볼  있다.

 우뚝 솟아있는 검은 대리석 묘지가 십자가 문양이 그려져 있는 철문으로 굳건히 닫혀 있다. 마치 고급 저택의 대문 앞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대부분의 묘지가 흰색 혹은 회색이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 그리고 철문 사이사이에는 누군가 두고 떠난  얼마  되어 보이는 생기 넘치는 여러 송이의 꽃들로 에비타의 묘지임을 확신할  있었다.

 에비타는 대통령 영부인 에바 페론의 애칭이다. 그녀는 가난한 무용수에서 영부인의 자리까지 올라와 노동자와 여자를 위해 일했다. 당시 양극화가 심했던 아르헨티나의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공을 새웠다는 호평을 받는다. 물론 한쪽에서는 그녀가 포퓰리스트라고 비난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녀를 두고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와 꽃을 두고 간다는  여전히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변함이 없는  같다.





 에비타 묘지만큼, 아니  그녀의 묘지보다 더 인상 깊게 본 묘지가 있다.



 가이드 집사님이 한 묘지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다른 묘지들과는 다르게 높이 세워진 전신 동상이다. 무표정에 강직해 보이는 이 묘지의 주인은 한 손에는 책을 쥐고 있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최초의 헌법을 만든 정치가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아더 이다. 비록 망명생활을 하셔서 시신을 찾지 못했지만 헌법 제정에 큰 기여를 한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묘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법대 시절을 함께 한 다섯 친구들과 미래에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꿈을 키웠고 그것을 마침내 실현시켰다고 한다


 생기 넘치는 볼을 가진 야망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과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동시에 그려져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말년이 좋아야지 젊을 때 잘 나가는 아무 소용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쎄, 이렇게 한 순간이라도 자신의 인생의 불꽃을 태운 적이 있다면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더러 그 인생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가문이 몰락하면서 관리가 안된 묘지와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닿아 반들반들 잘 닦여 있었는 묘지는 한눈에 구분이 간다. 사후에서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에 씁쓸해졌다. 하지만  묘지가 피라미드나 타지마할처럼 엄청나게 화려하고 거대할지언정 죽는다면,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일까. 그곳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부럽다고 생각할리 만무하다.


 누군가 멋진 묘지로 나를 기린다면 그것 나름대로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내가 나서서 무덤을 멋지게 장식하고 꾸려달라고는 결코 하지 않을 거다.


 나의 반짝이는 선망의 눈길은 그들이 얼마나 멋진 묘지에 잠들어있는가 와는 전혀 관계없다. 오로지 그들이 살아생전 세상 여기저기를 누비며 자신이 믿었던 것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낸 열정에 대한 찬양이다. 그들이 눈을 감기 전 떠올릴 법한 장면들을 나 역시 살아보고 싶다.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싶다기 보다는 어떤 찬란한 순간을 맛보고 싶달까? 그런 뜨거운 삶을 살았다면 묘지의 형태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 날들이 지나고 점점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바로 등 뒤에서 슬그머니 다가와 '왁!'하고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광활한 우주 속 아주 작은 존재인 대단치 않은 내가 어느 한순간 세상에 사라지는 것은 별 일 아니라고 생각되다가도 문득 오싹해진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건 둘째치고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영화 속에서 보던 것처럼 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문으로 들어갈지, 천사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새하얀 마을에 있을지, 온 사방이 컴컴한 진공 속에 있을지 도저히 알 수 없다(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소중한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는 건 그런 생에 대한 아쉬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지. 그 끝을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아쉬워질까.


뜨겁게 불타오르는 삶도, 잔잔히 흐르는 삶도, 홀로 채우는 시간도 함께 보내는 시간도 모두.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삶을 살 수 있길.


이전 27화 후지 여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