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당근 Sep 01. 2022

이 삶의 끝엔 죽음이 있지만(2)


 에비타 묘지만큼, 아니  그녀의 묘지보다 더 인상 깊게 본 묘지가 있다.



 가이드 집사님이  묘지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다른 묘지들과는 다르게 높이 세워진 전신 동상이다. 무표정에 강직해 보이는  묘지의 주인은  손에는 책을 쥐고 있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최초의 헌법을 만든 정치가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아더 이다. 비록 망명생활을 하셔서 시신을 찾지 못했지만 헌법 제정에 큰 기여를 한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묘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법대 시절을 함께 한 다섯 친구들과 미래에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꿈을 키웠고 그것을 마침내 실현시켰다고 한다


 생기 넘치는 볼을 가진 야망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과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동시에 그려져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말년이 좋아야지 젊을 때 잘 나가는 아무 소용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쎄, 이렇게  순간이라도 자신의 인생의 불꽃을 태운 적이 있다면 그런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더러  인생을 함부로 이야기할  없다.


 가문이 몰락하면서 관리가 안된 묘지와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닿아 반들반들 잘 닦여 있었는 묘지는 한눈에 구분이 간다. 사후에서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에 씁쓸해졌다. 하지만  묘지가 피라미드나 타지마할처럼 엄청나게 화려하고 거대할지언정 죽는다면,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일까. 그곳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부럽다고 생각할리 만무하다.


 누군가 멋진 묘지로 나를 기린다면 그것 나름대로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내가 나서서 무덤을 멋지게 장식하고 꾸려달라고는 결코 하지 않을 거다.


 나의 반짝이는 선망의 눈길은 그들이 얼마나 멋진 묘지에 잠들어있는가 와는 전혀 관계없다. 오로지 그들이 살아생전 세상 여기저기를 누비며 자신이 믿었던 것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낸 열정에 대한 찬양이다. 그들이 눈을 감기  떠올릴 법한 장면들을  역시 살아보고 싶다.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싶다기 보다는 어떤 찬란한 순간을 맛보고 싶달까? 그런 뜨거운 삶을 살았다면 묘지의 형태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 날들이 지나고 점점 죽음을 향해  걸음  걸음 나아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바로  뒤에서 슬그머니 다가와 '!'하고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광활한 우주  아주 작은 존재인 대단치 않은 내가 어느 한순간 세상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다가도 문득 오싹해진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아무도 모르는  둘째치고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영화 속에서 보던 것처럼 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문으로 들어갈지, 천사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새하얀 마을에 있을지, 온 사방이 컴컴한 진공 속에 있을지 도저히 알 수 없다(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소중한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는 건 그런 생에 대한 아쉬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지. 그 끝을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아쉬워질까.


뜨겁게 불타오르는 삶도, 잔잔히 흐르는 삶도, 홀로 채우는 시간도 함께 보내는 시간도 모두.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삶을 살 수 있길.





매거진의 이전글 후지 여관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