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습작노트

도망가지 않으려면

by 독당근



새벽 일찍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해준 아빠와 포옹을 할 때도, 공항까지 나와준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힘 찬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그들이 사라지고 혼자 공항에 남았을 때 나는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었던 가슴도 맥없이 꺼져버렸다. 또다시 나의 고질병이 돋은 것이다.

갑자기 '만약 이 여행 끝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면'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기대와는 달리 집으로 돌아갈 때 초라한 답을 손에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어떻게 하면 그럴듯해 보이는 답을 찾을 수 있을지 궁리하게 된다. 내가 본 많은 여행 에세이 저자들이 했던 여행을 비슷하게 흉내 낸다면 나도 그들처럼 멋진 걸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작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하다. 그래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아주 조금은 눌러볼 수 있었다.


잠이 덜 깨 비몽사몽 눈을 떠 모니터로 비행기 위치를 확인했을 때 비행기는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먼 길을 떠나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수십 번도 더 한 질문. 늘 그렇듯 답을 내리지 못했다. 분명 내 삶에 대한 수많은 고민의 중요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로 출발했으나 그게 '여행'으로 찾을 수 있다는 건 순전히 나의 직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이제 막연함도 만성이 되어 익숙하다. 나는 애써 답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예약한 항공편은 인천에서 밴쿠버 그리고 토론토를 거쳐 마지막 종착지인 상파울루에 도착하는 루트였다. 남미는 지구 반대편이니 비행시간은 무려 24시간이다. 두 지역을 환승하고 통과하는 시간은 14시간으로 총 38시간이 걸렸다. 출발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나 예상보다 훨씬 진이 빠져버렸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밴쿠버와 토론토를 환승할 때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공항과 수많은 외국인들에 압도당했다.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가지 않고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또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분명 인터넷에서 봤던 글에는 표지판만 잘 따라가면 된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표지판을 봐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써 헤매지 않는 척 고개를 크게 두리번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히 눈치껏 사람들을 따라가다가 입국심사 줄을 찾을 수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일본인 여자분에게 이곳이 환승하는 곳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분은 친절하게 이곳이 맞다고 말해 줬다. 안심이 되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던 공항 직원에게 한 번 더 물어봤다. 그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이 맞다고 말했다. 제대로 줄을 섰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문득 입국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글을 본 것이 떠올라 긴장이 됐다. 줄을 서는 동안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두 개의 입국심사 부스가 있었고 기다랗게 줄을 선 사람들이 심사가 끝난 부스로 차례대로 걸어갔다. 줄이 짧아질수록 심장이 더욱 쿵쾅거렸다. 이제 와서 돈을 더 들여서라도 직항을 탔어야 했나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입국심사관 두 사람 모두 남자였는데 한 분이 좀 더 편안하게 느껴져 그분이 심사를 하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깐깐한 인상의 심사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NEXT!"

나는 심사관에게 먼저 여권과 입국심사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입국심사 카드를 대충 훑어보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캐나다에는 왜 왔습니까?"

"저는 브라질로 갑니다."


"브라질은 왜 가나요?"

"친구를 만나러 가요."


"한국인?"

"아뇨. 브라질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우리 고향에서 만났다." (왠지 동문서답을 한 느낌이다.)


"그녀는 일하러 왔었나요?"

"네"

"브라질엔 얼마나 머물 건가요?"

"친구 집에서 3개월 지내다가 남미를 여행할 거예요."
(너무 오래 있는다고 하면 수상하게 볼까 봐 기간을 줄여서 말했다)


"언제 가나요? 캐나다엔 머물 건가요?"

"아뇨. 지금 가야 해요"

"Ok."

괜히 거짓으로 답한 것으로 오해를 살까 봐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심사관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내 여권에 쾅하고 도장을 찍었다. 여권을 받아서 도장을 확인하자 큰 산을 넘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토론토행 비행기가 30분 연착되었으나 환승시간이 넉넉해서 문제없었다. 중간에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다시 찾아야 하는 과정이 없어 다행이었다. 환승을 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미션인 나에게 매번 짐을 찾아서 붙여야 했다면 분명 과부하가 걸렸을 것이다. 드디어 캐나다를 벗어나 브라질로 간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토론토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커다란 도시에 금빛 불들이 빼곡히 반짝인다. 갑자기 이 장면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창문에 나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는 내가 너무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최대한 야경을 예쁘게 찍으려고 카메라 셔터를 여러 번 눌렀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나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촌스럽게 굴었나 싶어 민망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비행기 창밖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들떠 있는 젊은이를 응원하는 미소였다고 생각된다. 신기하게도 여행에서 만난 많은 얼굴들이 흐릿한데 그분의 얼굴과 털모자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비행기에서도 모자를 쓰나?)



브라질로 향하는 마지막 비행이다. 곧 내가 그토록 바랐던 종착지에 도착한다. 출발 전부터 마음에 무겁게 자리 잡았던 감정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비행기 안에서 잠들고 깨기를 반복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난 질문 역시 가슴 한가운데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그 무거움은 여행을 계획하기 훨씬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무거움이라는 걸 알고 있다. 과연 그걸 남미에 내려놓고 올 수 있을까? 어쨌든 난 그 무게를 견디며 지구 반대편까지 오게 되었음에 스스로를 격려해본다.







기나긴 여정 끝에 브라질에 도착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태양인가! 더운 공기가 훅 하고 들어와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바깥 풍경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열대 나무 몇 그루가 거리에 있었다. 날씨는 우리나라의 덥지 않은 여름 정도이다.


근처에 스피커가 있는 건지 음악 소리가 들렸다. 리듬을 타고 싶게 만드는 기분 좋은 멜로디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남자가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기타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보다는 작은 악기였다. 그 음악을 듣는 순간 브라질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