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남미 배낭여행기를 쓰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8년이 지났고, 여행의 기억은 나에게서 점차 흐려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1년 동안은 매일같이 들뜬 마음으로 남미에서 썼던 글과 사진을 꺼내보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신나게 남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만큼 남미 여행은 나에게 큰 기쁨이자 자부심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 남미 여행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를 열어보니 가장 먼저 준비물 목록이 보였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일념 아래 대부분의 물건을 온라인 쇼핑몰에서 낮은 가격순으로 정렬해서 샀던 기억이 난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여행 도중에 다시 사야 했던 물건들이 꽤 있었다(트레킹 도중 배낭이 끊어진 슬픈 기억이..). 그리고 옆 페이지에는 '도전', '모험', '발견'과 같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단어를 안 써본 게 얼마나 되었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사회에서 자리잡기 위해 시험에 ‘도전’을 하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단어처럼 느껴진다.
노트를 더 읽어 내려가다 마치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낯선 기분이 들어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여행에서 막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여행이 계속 내 삶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길 바랐다.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안정과 여유가 생길 때, 나의 여행을 멋지게 기록해서 소중히 간직할 거라 다짐했다. 그런 결의가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직장인이 되어서도 무슨 이유인지 아무것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내가 있었다.
그런 기간이 길어지면서 여행을 되새기는 것보다 눈 앞에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내는 게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나를 재촉하면서 열심히 달렸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 믿었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브레이크가 걸린 것 마냥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해도 어수선하고 안절부절못했으며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느낌에 괴로웠다. 내 안에서 들리는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커다란 울림. 결국 이 여행을 정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마주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남미 여행 노트와 사진을 보았을 때의 낯선 기분은 나에게 아픔이었다. 더 이상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꿈, 희망, 자유, 방황과 같은 단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마지막으로 생명력과 같은 활기 넘치는 젊음의 에너지가 사라져 가는 것 모두.
이 여행의 기억이 소화되지 않은 채 얹혀버린 건 내 삶에서 그저 흘려보내면 안 되는, 혹은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그 안에 있어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그게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기도 하고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결국엔 후회만 가득한 어른이 된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될까 겁이 났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다시 꺼내볼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니까.
이번에는 절대 중간에 멈추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남미 여행 노트를 펼쳐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노트에는 생각보다 세세하게 그때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어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당시의 기억을 자세히 떠올릴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느꼈던 설렘, 두려움, 걱정, 기쁨과 슬픔과 같은 감정 역시 그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마치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20대의 고민 많은 나와 반가운 친구들의 얼굴이 나를 맞이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