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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당근 Dec 13. 2020

바네사와의 재회


 바네사를 다시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이 안되었다. 우리가 아쉬워하며 헤어진 게 얼마 안 된 듯 하지만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난 상태였고, 나는 그녀가 없는 시간을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문득 만났을 때 서로 어색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으나 기우였다.  바네사는 출구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주어 그녀를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만났던 모습 그대로 따뜻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주변은 온통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그 미소를 보자 긴장이 풀리면서 길고 외로운 비행의 무거운 피로가 한 겹 벗겨졌다.
 
 바네사의 집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버스로 3시간은 더 들어가야 하는 바다 마을 '마카에'에 있었다. 그때는 바네사를 다시 만나 마냥 반가워하기 바빴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오직 나를 위해 먼 길을 와준 그녀의 노고가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새삼 미안해진다.








 우리는 우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버스터미널 근처의 음식점으로 갔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뇨끼라는 음식을 먹었는데 당시에는 이게 뭔지 몰라 브라질 음식으로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이건 이탈리아 음식이었다. 먼저 몇 가지 재료를 고르면 요리사가 크림소스와 함께 조리를 해준다. 한국인 입만인 나에게는 소스가 진해서 꽤 느끼하게 느껴져 다 먹진 못했지만 먹을만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에 동양인으로 어디에도 없었다. 마카에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는데 꼬마 아이가 나를 신기한 듯 빤히 바라보았다. 호기심 어린아이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나를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깐. 바네사와 나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 키득거렸다.

 버스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바네사와 브라질에서 만나 그녀의 집으로 가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우리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동네의 샌드위치 가게, 산책로, 길거리에서 함께 했는데 말이다. 감기려는 눈을 겨우 떠서 물만 묻히고 집을 나온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브라질에 와 있다니. 이게 꿈은 아닌지 그녀에게 물어보려다 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멋진 꿈은 꿔 본 적이 없으니깐.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바네사 집의 첫인상은 하얗고 깔끔했다. 바네사 집 곳곳에는 그녀가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작은 장식품들과 한글이 적힌 식탁보에서 한국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와아- 하며 집안을 둘러보고 나서 그녀에게 "I like your home!"이라고 신나 하며 말했고 그녀는 웃었다. 샤워로 여독을 풀고 난 뒤 우리는 다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바네사는 부모님이 내가 이 먼 곳까지 온 걸 허락해주신 게 신기하다고 했다. 브라질 사람인 자신에게도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바네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나 외국인의 눈에 나는 10대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인다고 하며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걱정하는 부모님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부모님은 유난스럽게 말하거나 행동하기보다 무던하신 편이라 약간은 무심하게 느껴진다. 그런 것들이 서운하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하며 방황할 때는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시는 게 더 힘이 된다. 아직도 그 당시 여행을 떠나는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부모님은 나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다.

"네 부모님은 나를 잘 모르시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건 어떻게 생각하셔?"
바네사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음.. 부모님은 나를 믿으시니깐 너도 믿으실 거야!"
이 질문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이 말을 뱉고 나서야 바네사와 나 사이에 현실적인 정보가 부재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나이도 직업도 정확히 모른다. 언뜻 바네사가 말해준 기억 있지만 나에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방 잊어버렸다. 그녀 역시 나에 대해 아는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작정 브라질에 온 나도, 선뜻 나를 집에 들인 바네사 역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고작 안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존재만으로 남미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바네사가 내 메일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낸 그 이후부터의 모든 과정은 이상하리 만치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내 삶에 사람을 하나 들여놨을 뿐인데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의 요청에 그녀가 손을 내밀어준 순간, 이 여행을 시작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마치 나는 이런 기회가 오길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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