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가 넘어서야 눈이 떠졌다. 너무 피곤해서 더 늦게 일어날 줄 알았는데 비행기에서 많이 잤던 터라 생각보다 일찍 눈을 뜬 것 같다. 그래도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바네사가 마련해 준 매트리스는 아주 편안했다. 그녀의 집은 그리 넓지 않아서 나를 위해 자신의 침실 한편을 내어주었다. 깨끗한 침대 보는 내가 환영받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줬다.
다음날 나는 바네사와 함께 동네를 익히기 위해 처음으로 집을 나섰다. 2월임에도 이곳은 여름 날씨이다. 그녀는 보통 이것보다 훨씬 덥다고 말했다. 길을 걷다가 익숙한 공원을 발견하곤 무척 반가웠다. 이곳은 출국 전 미리 바네사의 주소를 받아 집 주변을 구글맵으로 검색했을 때 봤던 곳이었다. 나는 미리 바네사 집 주변을 샅샅이 살펴봤는데 얼마나 자주 봤는지 단번에 이 공원을 알 수 있었다.
브라질에 가게 될 날을 고대하며 현지인인 양 산책을 하는 일상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내가 실제로 여기에 오다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마음이 설레었다. 하지만 바네사가 낮에는 경찰이 있어 괜찮지만 웬만하면 공원을 둘러서 가라고 말을 듣고는 웃음기가 사라졌다.(마약상을 만나고 싶지 않다)
마카에 시내는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바네사는 우리가 한국에서 처음 만난 동네인 옥포와 비슷하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훨씬 더 큰 것 같았다. 둘의 공통점이라 하면 바다를 끼고 있는 동네라는 것뿐이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바네사의 단골 베이커리에 갔다. 빵을 고르고 안에 넣을 재료 몇 가지를 사면 되는데 재료와 상관없이 무게에 따라 값이 정해졌다. 계산을 할 때 꼬마 남자아이가 나를 자꾸 힐끔거리며 바라봤다. 어제 버스를 탈 때도 그렇고 어른들은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아이들 눈엔 내가 신기한가 보다. 나는 빵과 라테를 바네사는 빵과 초코 라테를 주문했다. 라테는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마트에 갔다. 바네사는 한 달의 반은 일을 하러 외지로 가고 나머지 반은 집에 머무른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다음날 바로 일을 하러 떠나야 했다. 그녀가 없을 때도 굶지 않으려면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에게 가장 큰 미션이다. 처음 들어갔을 때 가장 놀란 건 엄청난 양의 과일이었다. 마트 대부분의 공간을 과일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과일도 많았다. 애플망고, 파파야, 구아바, 서양배, 슈가애플, 패션 프룻 등 갖가지 과일을 신기해하며 장바구니에 하나씩 담았다. 브라질에서 슈가애플과 파파야를 원 없이 먹었던 것 같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달달한 과즙이 넘치는 싱그러운 맛이다.
우리는 장을 본 것들을 집에 두고 다시 길을 나서야 했다. 내가 공부를 할 스페인어 학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지만 남미 대부분의 나라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이기 때문에 배낭여행을 무사히 잘 해내기 위해서는 스페인어 공부는 필수이다.
바네사는 내가 좋은 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미리 몇 군데를 찾아봤었다. 우리는 학원을 여섯 군데나 돌아다녔지만 영어로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반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많아 스페인어는 독학을 하고 영어를 배워야 할까 생각했다.
다행히 일곱 번째 방문한 학원에서 영어로 스페인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시다고 했다. 나중에 한 군데를 더 들렀는데 그곳이 더 조건이 좋아 일곱 번째 학원에서 배우기로 결정했다. 수업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두 시간씩 듣는데 리셉션 직원은 이렇게 하면 베이직 코스는 세 달이면 끝난다고 말했다. 수업료는 한국 돈 33만 원으로 아주 저렴했지만 책값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메인 북 한 권과 얇은 부록 책 두 권이 15만 원이라니! 나는 놀라며 바네사에게 왜 이렇게 책이 비싼지 물었다. 바네사는 브라질은 원래 책이 엄청 비싸다고 말하며 그 이유는 본인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마존을 지키기 위한 건가?라고 나름 추측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스페인어를 배우지 못했다. 수업을 여러 번 미루더니 갑자기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 남자 선생님이라 해서 나름 기대를 했는데 아쉬웠다.(여행 전 어떤 책에서 아르헨티나 남자가 멋있다는 걸 봐서) 약속이 이렇게 쉽게 깨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여행을 뒤돌아보는 지금에서야 남미에서 이런 것들은 일상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연방 경찰서를 들렀다. 브라질에서는 세 달 동안 무비자로 지낼 수 있는데, 그 기간을 넘어가면 벌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도록 미리 연장 신청을 하는 게 좋을 거라 판단했다. 연장을 하면 세 달이 추가되어 총 여섯 달을 무비자로 있을 수 있다. 입국심사의 경직된 분위기가 기억나 긴장하면서 갔는데 생각보다 작은 곳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직원분이 연장은 조금 늦게 하는 게 좋다고 해서 대략 두 달 뒤인 4월 1일에 다시 하러 오라고 했다.
비자 연장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래와 같다.
1. Customs card(안 버려서 다행이다)
2. Coppy passport
3. ticket to comeback Korea
4. Prove the money to stay in Brazil
(그냥 카드만 복사하면 된다고 한다)
5. Vanessa 's address
6. R$ 67.00
생각보다 간단하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뒤 어둑해졌을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지 고작 이틀이 되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바네사 집이 내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진작 꺼냈어야 할 문제에 대해 바네사에게 말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나는 6개월 동안 그녀의 집에 머무르면서 관리세를 어떻게 지불하면 될지 물어보았다.
이건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게다가 바네사는 한 달에 반은 집을 비우는데 나 혼자 이 집을 쓰면서 아무런 돈도 지불하지 않는 건 너무 염치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괜찮다며 손사래 치며 음식값만 반씩 나누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너무나도 큰 신세를 졌기에 돈 대신 다른 것으로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나는 바네사의 큰 관심사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임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의 경험으로 브라질은 책값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곧장 인터넷에 있는 베스트셀러 한국어 공부 책 세트를 찾아 부모님께 택배를 보낼 때 함께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뒤늦게 도착했으나 바네사에게 책을 선물할 수 있어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내가 받은 많은 것들에 비해서는 아주 작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