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러너가 되고야 말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by 독당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본 이후로 머릿속 한가운데 '러너가 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하루키는 그가 했던 것은 모조리 따라 하고 싶어 지게 만드는 신묘한 재주가 있다. 그건 '달리기'라도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줏대가 없는 내 문제도 있겠지만 나라고 모든 사람을 따라 하는 건 아니니 역시 하루키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이 책은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눈을 번뜩이게 만들 정도로 내 마음을 정확히 꿰뚫었다. 나와 국적, 성별 그리고 살아온 시대를 포함하여 그 어떤 것도 접점이 없는 사람이 나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내 마음을 세련되게 옮겨둔 것이 감사하고 신기했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도서관에 반납한 뒤 곧장 책을 주문했다. 다시 책을 천천히 읽으며 인상 깊은 부분에 정성스레 꺽쇠 모양의 스티커를 붙였다. 그리고 한 단어도 놓치기 싫다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꾹꾹 눌러 필사했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내용에 비해 너무 무겁고,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의 글을 필사하고 또 그가 했던 것을 따라 하고 싶은 대부분의 이유는 그처럼 글을 잘 쓸 수 있는 비결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루키 특유의 쿨한 태도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 분명 그는 그의 책 속에서 스스로를 불안정한 사람으로 가끔은 우습고 만만한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단언컨대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할 단단한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달리기로 단련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세계적인 작가이니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기도 하지만)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하며 글쓰기와 자신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이 세 가지 모두를 관통하는 무섭도록 일관된 태도가 그를 쿨하게 느끼게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세상에는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 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녀들의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멋있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확실하게 이어져가는 것이로구나, 하고 소박하게 실감한다. 그것은 결국 인류 대대로 내려오는 전달 사항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에게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해도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자랑스럽다고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성취감 같은 것이 이제야 생각난 듯이 가슴속에 북받쳐 오른다. 그것은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만한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이었다. 기쁨보다는 안도감 쪽이 오히려 강했는지도 모른다. 몸속에 견고하게 묶여 있던 매듭 같은 것이 점점 느슨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내 안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지만>

<나는 기록에 도전하는 무심한 젊은이도 아니고, 한낱 무기적인 기계도 아니다.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자신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해가려 하는, 한 사람의 직업적인 소설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어떻게 러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결정적으로 내가 당장 러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하루키가 지금 내 나이인 33세에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마음이 조급 해지며 '러너가 되고야 말겠다'는 생각 앞에 '올해에는'가 덧붙게 되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나이에 의미부여를 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책에서 어떤 사람이(특히 유명인) 몇 살에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걸 보면서 나도 그때쯤 그와 비슷한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은 책을 보며 '아직 여유가 있어!'라고 생각하기엔 애매한 나이가 되었다. 그보다 '시간이 촉박한걸?'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일본에서는 만으로 나이를 계산하니 하루키가 35세에 달리기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운 합리화를 하기 전에 나는 이번 해부터 달리기로 했다.

지난 토요일 나는 집 근처 남산으로 향했다. 고작 왕복 두 시간 거리의 산책로를 뛰었을 뿐인데 몇 년간 방치한 몸은 버티지 못하고 달리기보다는 걷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오르막길이 길게 이어지자 숨이 가쁘고 배가 메슥거렸다. '첫날부터 굳이 꼭대기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키가 말한 '위험스러운 일을 극복할 힘'이 내 안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위험하다고 하기엔 민망한 거리지만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이 고통을 건져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20대와 비교해서 일부러 위험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주말 아침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느끼며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지금처럼 퇴근하고 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카페에 와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 이걸 한다고 누가 나를 알아준다거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천 원이 넘는 음료값을 지불했다. 물론 누군가 인정해주고 돈을 벌 수 있다면 감사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이 느껴진다. 그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했을 때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고, '지금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라고 물었을 때 역시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키의 말처럼 온전한 인생을 살기 위해 주어진 한계 속에서 나를 충분히 연소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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