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이 국립공원
모로코이 국립공원으로 가기 위해는 시우닷 볼리바르에서 발렌시아를 거쳐 투카카스로 가야 한다. 모로코이 국립공원은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다시 투카카스에서 보트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여행자가 어느 한 곳이라도 쉽게 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투카카스에 도착하니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날씨가 완전히 달라졌다. 뜨겁게 내리꽂는 태양과 후덥지근한 공기에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지난 며칠간 쉼 없는 일정들로 이미 피로가 충분히 쌓여있던 터라 더위를 방어하지 못한 채 그대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호스텔은 산타 엘레나보다 3배나 비싸다. 유명세로만 보면 로라이마가 있는 산타 엘레나의 호스텔이 더 비싸야 할 것 같은데 국내에서의 입장은 다른가보다. 아마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라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어느 나라든 휴양지는 바가지를 씌우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비싼 만큼 에어컨이 팽팽 잘 돌아가는 덕에 잠시 더위를 식히며 쉴 수 있었다.
겨우 체력을 보충하고선 몸을 일으켜 택시를 잡아 선착장으로 향했다. 모로코이 국립공원은 낮에 보트를 타고 들어갔다가 해가 지기 전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역시나 관광지답게 보트 삐끼 아저씨들이 북적였다. 하지만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구애에 가까운 적극적인 어필이 없어 부담을 덜 수 있다.
나무 팻말에 쓰인 가격표를 보니 대여섯 개의 섬이 거리에 따라 가격이 다르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웬걸 입장료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쌌다. 내 수중엔 200 볼 밖에 없는데 가장 가까운 섬이 두배가 넘는 500 볼이었다. 200 볼 밖에 없다며 곤란해 하자 아저씨는 너무나도 쿨하게 200 볼에 태워 주겠다고 했다. 다시 숙소에 돌아가 돈을 넉넉히 가져와 멀리 있는 섬까지 갈까 고민하다가 그 정도로 의지가 있는 건 아니라 아저씨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를 따라 부두로 가니 두 사람이 타면 딱 알맞은 크기의 보트가 있었다.
탈탈탈-
초록빛 물결을 가르며 달린 지 30분도 채 안되어 아담한 크기의 해변이 있는 섬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나를 내려주고는 곧바로 배를 돌렸다. 보트가 점점 작아지더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휑한 모래사장에 홀로 남겨진 나는 덩그러니 서 있다가 바닷물에 다가가 두 발을 담가보았다. 물결모양이 굽이굽이 그대로 보인다. 다시 발을 빼고 모래사장으로 올라와 또다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그 자리에 풀썩 앉았다. 눈부신 태양 아래 초록빛 파도가 쏴아아- 밀려왔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마치 엽서 속에 있는 그림의 한 부분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두 눈에 가득 찼다가도 마음속에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 채 그대로 사라져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수영복이나 책을 챙겨 오지 않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다. 이 섬을 둘러싼 자연물의 색을 본뜬 듯 연두색, 베이지색, 하늘색의 파라솔과 의자가 한 세트로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쏴아아- 쏴아아-
해변에는 남매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사람들이 바다 위에 요트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휴양을 즐기는 이곳에서 오직 나만이 탈출을 꿈꾸는 표류자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싶더니 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는 파라솔 관리자였는데 스페인어라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앉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터벅터벅 근처 나무 그늘로 걸어갔다(물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친절하게 말씀하셨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을 더 가져와 볼거리가 많다는 먼 섬까지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편하게 파라솔 아래에서 쉬었을 텐데 싶었다. 뭐, 그렇게 했더라도 그다지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진 않지만. 햇빛 알레르기로 겨우 나았던 발등이 다시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괜한 고집을 부린 걸까? 두 손 놓은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에 짜증이 나다가 점차 서러워졌다. 분명 친구들과 함께 왔으면 달랐을 거다. 아니 차라리 쭉 혼자 여행을 했더라면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가 뻥하고 뚫려 찬바람이 스르르-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나에게 완전한 이방인이었는데, 참 신기하다. 남미에서의 시간은 일상과 다르게 흘러가나 보다.
문득 보트 아저씨가 나를 데리러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들었다. 배값의 반도 안 주었으니 아주 말도 안 되는 추측은 아니다. 혼자가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파도와 함께 휩쓸려 온다. 만약 밤늦게 까지 보트가 오지 않아도 파라솔 관리자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래도 파라솔에서 자면 안 돼요'라고 하겠지?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런 우려와는 달리 탈탈탈- 익숙한 소리를 내며 보트 아저씨가 제시간에 딱 맞추어 나를 데리러 왔다.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아저씨는 밝게 웃으며 "어땠어요?"라고 물어보았다. 그에 "좋았어요"라는 형식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 보트에 올라탔다.
점점 작아지는 섬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되돌아보면 그 섬에서의 공허하고 불안한 긴 시간은 나에게 필요했다. 삶에서 안정적이거나 웃게 하는 것 만이 의미 있는 게 아니니까.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결국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순간을 또다시 선택해야만 한다(스스로 선택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기도 하고). 이 여행을 선택한 이상 섬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는 건 숙명이다.
물론 여행에서 뿐만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