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타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볼리바르 광장은 이제껏 내가 봐왔던 광장 중에서 가장 컸다. 광장은 대성당, 의회, 대법원, 시청, 대통령궁과 같은 주요한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고 그 중앙에는 시몬 볼리바르 동상이 하늘 높이 우뚝 세워져 있다. 그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 무장투쟁을 통하여 식민지였던 파나마,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볼리비아를 스페인으로 독립시킨 대단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볼리바르 광장은 콜롬비아뿐만 아니라 페루, 볼리비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물론 보고타만큼 크지는 않지만.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고풍스러운 멋진 건물이나 동상보다는 사람 수를 훨씬 웃돌아 보이는 비둘기의 개체수였다. 비둘기에 시선이 뺏겨 동상이 있는 건 한참 뒤에 알게 될 정도였다. 같은 방을 쓰는 한국인 언니는 느릿느릿 걸어가던 뚱뚱한 비둘기가 다가오는 택시를 전혀 피하지 않고 걸어가는 걸 보곤 '어라 위험하겠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비둘기가 택시 바퀴에 말려들어가는 끔찍한 장면을 봤다고 했다. 말로만 전해 들어도 눈이 질끈 감긴다.
광장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사랑스러운 보테로 미술관이 나온다. 페르난도 보테로는 남미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그의 작품은 모든 게 뚱뚱하다. 여자, 남자, 동물 심지어 꽃과 과일까지도. 보테로는 자신은 뚱뚱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확장해서 그릴 뿐이라고 했다. 어떤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작품관 덕에 이곳에서는 무척 흥미롭고 재밌는 그림과 조각을 잔뜩 구경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뚱뚱한 모나리자 옆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확인해 보니 나도 모나리자처럼 푸둥푸둥 살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이건 호스텔에서 아침식사로 나오는 빵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다. 그것도 버터를 잔뜩 발라서.
보테로 미술관 중앙은 분수와 정원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 덕에 다음으로 이어진 건물로 가기 전에 따스한 햇살을 쬐며 리프레쉬할 수 있다. 멋진 작품들을 감상하여 기분이 한층 들떠있었고 유독 하늘이 푸르르고 구름이 포근하여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유유자적함을 한껏 느끼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상기된 표정의 콜롬비아 학생들이 마치 미지의 생명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사람이세요?"
다른 학생들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는 밝고 건강한 미소의 여학생이 유창한 한국말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는 남미 사람은 처음 봐 나 역시 무척 신기했다.
"네 공부하고 있어요. 같이 사진 찍어도 되나요?"
뒤에 있는 네다섯 명 정도의 학생들이 기대에 찬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네, 뭐. 좋아요."
학생들은 입을 모아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실 남미에서 사진 요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로라이마 산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첫날 10대로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키가 크고 굉장히 수줍은 표정을 하는 소년을 가리키며 친구가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데 같이 찍어줄 수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꽤 당황스러운 요청이었지만 요구에 응해주었다.
남미에서는 어떤 이유인지 한국인과 같이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저기, 저와 사진을 찍고 싶은 이유가 뭐죠?'라고 물어볼 만도 했지만 왠지 민망하여 물어보지 않았다. 한류 열풍이 남미까지 간 건가? 싶지만 그런 것과 나는 별로 상관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상대 쪽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하지만 잔뜩 기대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부탁하면 거절하기가 힘들다. 이후에도 그런 부탁이 많았고 모두 응해준 탓에 지금도 내 사진은 남미 곳곳에 떠돌고 있을 거라 예상된다. 혹은 며칠 안 가 '이런 사람이랑 왜 찍은 거야' 하고 지웠을 수도 있지만.
신이 난 학생들과 한창 사진을 찍는데 익숙한 사람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엔젤폭포로 가는 길에 만난 일본인 할아버지 이지마상이었다. 이지마상은 우리와 달리 단체로 팀을 짜서 움직이지 않고 개인적으로 투어를 신청하여 일본어를 잘하는 가이드와 단 둘이 움직였다. 스페인어도 영어도 서툰 이지마상은 사쿠를 보며 상당히 반가워하며 아주 길게 대화를 나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자유롭게 남미를 여행할 수 있는 건 재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정도의 재력이 없으니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이지마상도 나를 기억하는지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일본 특유의 힐링 영화에 나오는 인물과 같은 인상이다.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않은 잠깐 스친 인연일 뿐인데 또 다른 나라에서 이렇게 우연히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어느 숙소에서 지내냐는 질문에 그는 근처 호텔에 투숙 중이라고 했다. 역시 도미토리를 전전하는 나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