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으로 사쿠와 연락이 닿았다.
사쿠는 아직 알롱과 함께 있었고 알고 보니 내가 머무는 호스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투숙하고 있었다. 우리는 3시에 황금박물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같은 방을 쓰는 선영언니와 함께 겨울 점퍼를 사러 쇼핑몰에 갔다. 존의 어머니께서 싸고 괜찮은 옷이 많다고 추천해주신 곳이다. 내가 가진 옷은 얇은 옷뿐이라 늘 버스 안에서 추위에 떨었기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겉옷을 장만하고자 마음먹었다. 쇼핑몰을 빙빙 돌다 벽에 걸려있는 가죽점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에 인조털이 달린 짙은 회색빛의 인조가죽점퍼였는데 가격은 오만 원으로 배낭여행자에게는 꽤나 사치스러웠다. 조금 망설여졌지만 사장님이 하나밖에 안 남았다고 했고, 언니가 나와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다(그래도 여행 내내 잘 입고 다녔으니..).
쇼핑을 마친 후 언니는 장을 보러 갔고 나는 약속시간보다 이십 분 일찍 도착해버려 박물관 입구 계단에 쭈그러 앉았다. 기다리는 동안 문득 친구들과의 재회가 어색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여기서는 어떤 목적지까지 함께 도달해야 하는 미션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정말 '보통 친구'처럼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이렇게 쓰고 보니 표현이 이상하다).
이런 잡생각으로 멍하니 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저 멀리서 알롱이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는데 그는 엄청 시크한 표정으로 앉아라는 듯 손을 휘휘 위아래로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콜롬비아 친구와의 약속으로 인해 뒤늦게 합류하는 사쿠가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알롱과 나도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겨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먼저 황금박물관을 구경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박물관 역시 보고타를 대표하는 관광지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재회장소 이상의 감흥을 주지는 못하였다. 눈앞에 번쩍이는 무수히 많은 황금과 세밀한 세공이 신기하긴 했지만 가질 수도 없는 차가운 황금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 어디로 들어갈지 정하고 있는데 오후 내내 우중충했던 하늘에서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수수 내리는 비에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몸이 으슬으슬 추워졌다. 당황한 우리는 일단 걷다 보면 카페가 나오겠지라고 생각하며 일단 길을 나섰다. 하지만 거리마다 잘 보이던 카페들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보이질 않았다. 여기는 커피의 나라가 아니었나?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게 몰아쳐 지쳐갈 때 우리 눈앞에 노란 불빛이 켜져 있는 자그마한 카페가 나타났다. 카페는 테이블이 서너 개 정도의 작은 크기였고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마치 우리만 기다렸다는 듯 따스하고 소박한 카페였다. 작은 라테를 시켰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단돈 800원밖에 하지 않는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서야 여유롭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에서 헤어졌을 때는 어쩌면 그들을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는데 이렇게 얼마 안가 만날 줄이야. 반가워서 마음이 방방 뜨기보다는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편안하여 오히려 더 좋았다. 살아가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관계는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머리 위에 말풍선으로 '아~ 정말 즐겁다'라는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서로 모국어가 달라 영어로 대화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물 흐르듯 대화가 흘러갔다. 영어를 유창히 잘하는 두 사람이 나를 무척이나 배려해준 덕이다. 우리는 각자 나라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사쿠는 일본 사람이 왜 이렇게 스미마셍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알롱은 한국에서 '밥 먹었니?'가 인사인 게 신기하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 간의 생각 차이, 마침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스페인어 더빙판 시크릿 가든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배낭여행을 온 것을 잊을 정도로 일상적이고 따뜻한 이 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며칠간 보고타에 머무르며 쉬는 동안 내 마음이 조금 약해졌나 보다.
그렇게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여전히 많은 비가 내린 탓에 우리는 호스텔이 모여있는 거리까지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우산을 쉽게 살 수 있는 대도시임에도 아무도 우산을 사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 셋 모두 비를 맞으며 고생하는 여행에 익숙해졌나 보다. 사쿠와 알롱의 숙소는 내가 머무는 호스텔 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먼저 그들을 보내야 했다.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 비 아래에서 우리는 흠뻑 젖은 얼굴로 포옹을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악수만 나눴던 사쿠와도 포옹을 하는데 거의 눈물이 흐를 뻔한 찡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만나기 힘들걸 알았는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이런 순간이 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기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밤늦도록 비는 그치지 않았다.
사쿠와 알롱이 각자 이별 선물을 챙겨줬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