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직을 하여 대한민국 대표 시간 거지(타임 푸어) ‘워킹맘’이 되었고, 우리 아이는 돌이 지나자마자 어린이집을 다니는 ‘어린이’가 되었다. 지척에 엄마가 살고 있지만, 나보다도 훨씬 덜 남았을지 모르는 엄마의 아직 건강한 여생을 황혼 육아로 옥죄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린이집 행’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아이가 짠하지 않냐고들 하는데, 아이가 도대체 몇 살에 가면 짠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세 살? 네 살? 아니면 다섯 살인가? 몇 살에 기관에 처음 가게 되더라도 아이들은 늘 마찬가지로 적응기를 거치는 것은 똑같다고 한다.
이제 우리 아이는 적응기를 거쳐서 매일 내가 집에서 챙겨하지 못했던 활동들을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접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제는 색깔 밀가루 반죽 놀이, 그저께는 악기 놀이를 했다고 한다. 인생에서 아이 생긴 삶에 내가 적응하는 것만큼, 아이 역시 일하는 엄마를 둔 삶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래 세상이 인간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 사실을 어리다고 아닌 척 부인할 필요 없다.
유태인들은 아기에게 처음 포도를 줄 때에도 일일이 분해해서 과즙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포도 알맹이를 하나 주고 아이가 알아서 껍질도 까고, 씨도 발라먹도록 기회를 준다는 말을 들었다. 어려움은 미리 다 해결해 주고, 일일이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 것만 접한 아이들과, 처음부터 스스로 연구하고 터득하는 습관을 들인 아이들의 자립심이나 창의력은 비교하지 않아도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듬직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부모들이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의 잠재력을 믿어주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자세가 아닐까?
인터넷을 보다 보면 뒤집기를 잘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자세라든가, 걸음마 보조 도구라든가 뭔가를 ‘빨리’ 하도록 ‘도와’ 주지 못해 조급증이 난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아이는 결국 다 뒤집고 서고 걷고 할 텐데. 오히려 아직 능력이 안되었는데 빨리 하라고 옆에서 부추기는 데에서 아이도 은근히 더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실제로 우리 아이는 그 어떤 것도 미리 부추기지 않았으나 알아서 제 때에 혹은 더 빨리 다 했으나, 반면 또래의 비슷한 월령의 아이는 서자마자 손잡고 억지로 계속 걷게 한 탓인지 몇 달이 지나도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혼자서 걷지를 못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백지와 같은 아이는, 본인에게 하나하나 주어진 삶을 충분히 소화하고 또 그에 맞춰 발달시키며 커 갈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세상에 원래가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 주겠다며 눈 앞의 파랑새를 놓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떤 삶이든 아이가 그 속에서 오늘도 행복한 것인지 늘 살피며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아닐까. 갓 돌 지난 아이에게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면서 아침마다 “어린이집 가는 것 좋아?”라고 유모차를 밀면서 물어보았다. 말은 못 하지만 대답은 잘하는 우리 아들은 일주일이 지나니 그때부터는 좋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전까지는 가는 것은 안다고 대답했지만, 좋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하였다.) 같은 반 엄마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아이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엄마는 너의 기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너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항상 전해 주려고 한다. “스트레스받은 엄마가 하루 종일 놀아주는 것보다, 하루 단 몇십 분이라도 ‘행복한’ 엄마가 잠시 놀아주는 것이 아이에겐 훨씬 더 긍정적이다.” 소아과 전문의의 산전 특강에서 들었던 말 중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한 마디이다. 우리 아이를 위해 무언가 끝없이 많이 해주는 것이 정답이 아니다. 뭔가를 못해주는 것에만 집중하여 죄책감 가지는 시간조차 아깝다. 아이를 정말 위한다면, 그 무엇보다 ‘행복한 엄마’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