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명물고기 Apr 22. 2020

섭섭함, 회사라는 그 알량한 대상에 대하여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봄직한 그 감정

섭섭한 감정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그것은 인간관계에서나 회사와의 관계에서나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작성했다가,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가독성을 감안하여 주제를 두 개로 쪼개어 글을 나누게 되었다. 직전 글은 인간관계 편이었다면, 이번에는 똑같은 기준으로 회사 편. 회사에 언젠가 어떤 이유로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면, 그 뒤엔 대략 세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가 전개 되었가능성이 있다.



1. 회사는 당신이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회사에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어째서 회사에서는 나를 그만큼 인정해주지 않는가"에 대한 불만들이 고과 시즌만 되면 쏟아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내가 열심히 했던 것'과 '회사가 알아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우직하게 열심히만 하면 자동적으로 다 알아줄까? 그렇지 않다. '열심히 한 것'만큼 '열심히 잘 알리는 것'에도 소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개인의 노고를 다 알아줄 만큼 회사는 한가하거나 너그럽지 않다. 물론, 실제로 하는 것보다 광을 파는 데에만 훨씬 집중하고 거기에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어서 짜증 날 때도 많은데, 그 사람들은 결국은 언젠가는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내가 한 만큼은 '충분히' 알려서 굳이 해놓고도 티 안나는 결과만은 피하자. 회사는 옆 사람 몰래 선의로 봉사하러 가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열심히 한 만큼은 반드시 제대로 인정을 받아내자.                               

 

2. 회사는 당신의 마음을 알지만 그 정도의 마음이 없다.


회사와의 관계에서도 인간관계에서처럼 그런 일은 종종 발생한다. 정말 열정과 실력을 발휘하여 회사에 충성했지만, 어쩌면 회사는 당신이 그랬거나 말았거나 딱히 중요한 사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비극은 그것도 몰라보고 맹목적인 충성을 퍼부은 당신의 잘못일까, 아니면 그만큼 열심히 해왔다는 것도 알지만 회사 내부의 기준에는 당신 열정의 결과가 사실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이 잘못일까. 가장 나쁜 경우는 회사가 마치 당신의 노고가 엄청난 의미가 있다는 듯이 고의로 '착각'하게 만들어 뽑아 먹고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치는 경우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상당히 흔하다. 신입사원 교육만 들어가 봐도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중요한 인재인 듯 대우해줄 것처럼 정신교육을 시키지만, 현업에 배치된 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은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을 늦게 얻게 될수록 당신의 배신감은 비례하여 커질 것이다. 나의 열정과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배팅하되 마음은 주지말자. 회사란 원래 심장이 없는 존재니까.


3. 회사는 당신의 충성심을 잘 알기에 한다고 한 건데, 성에 안찬다.


회사에서도 내가 열심히 공헌을 한 만큼 제 때 진급도 시켜주고, 보너스도 주고 해도 나는 그게 충분히 마음에 안들 수 있다. 나 정도 기여를 했다면 그냥 진급이 아니라 특진 정도는 해줘야 하고, 보너스도 이것보다 더 많이 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 즉 나보다 더 기여를 많이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보너스 건 뭐건 내규라는 것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를 특진시켜주는 경우 고려해야 하는 다른 직원들의 사기 등의 여러 가지 추가 요소들이 또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나서 회사의 입장에서는 정말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해 준 것일 수 있다. 그래도 내 성에 안 차는 것이라면 더 많은 대우를 해줄 수 있는 '여력이 있고, 여건이 되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더 맞을 수 있다. 인간관계와 달리 회사와의 관계는 사실 인정상 누가 누구를 봐주고, 참으면서까지 이어가야 할 필요가 없는 계약적 관계가 아닌가.



결국 서운한 대상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내가 생각해봤을 때 그 원인은 비슷하게 세 가지 정도의 결이 다른 이유들로 인해 발생하는 것 같다. 섭섭함의 기준은 결국 내가 정하는 것이고, 상대의 기준과 나의 기준은 같기보다는 다를 이유가 훨씬 더 많다.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기준을 조정하는 수밖에 없다. 나의 기준은 타협할 수 없는 불변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관계를 재설정(보통 '희생')하고 그 상태를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미적미적하면서 그냥 계속 섭섭한 채로 찜찜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어떤 쪽에도 건설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섭섭함, 그 알량한 감정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