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명물고기 Apr 21. 2020

섭섭함, 그 알량한 감정에 대하여

삼라만상 인간군상 있는 곳이라면 늘 있음 직한

인간에게는 오만가지 감정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섭섭함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것 만큼 기준 잣대 없는 감정이 또 있을까. "별 뜻 아니었는데, 서운하다니"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이럴 때 그 감정에 대한 책임은 '섭섭하게 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일까 아니면 '쪼잔하게 받아들인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일까. 쿨한 척하는 세상은 아마 후자의 해석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소위 '예민'하다고 치부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늘 전자의 결론으로, 상처 주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쌓여간다. 이 감정은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대략 세 가지 경우에 발생한다.



1. 상대는 당신이 얼마나 상대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 경우는 주로 짝사랑과 같은 경우에 많이 발생한다. 혼자만 끙끙 앓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굳이 상대에게 생색을 내는 게 덜해서 혹은 그것을 표현하는데 서툴러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흔히 보는 경우는 아마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외사랑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대부분의 자식은 죽을 때까지도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해 주었는지 결코 전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내가 까맣게 다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별 탈 없이 여기까지 키워준 것만으로도 평생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했을진대, 우리는 부모가 한 두 마디 서운하게 했다고 그것만 생각한다. 예전에 어떤 기사에 돈을 내놓으라고 싸우다 부모를 칼로 찌른 패륜아가 있었는데, 그 패륜아가 달아나는 상황에도 피를 흘리며 엄마가 한 말은 "피 묻은 그 옷을 갈아입고 달아나라"는 것이었다나.. 가슴이 아팠다. 부모도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것을 자식에게 평소에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자식도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스스로의 불필요한 정서적 결핍도 덜 발생하여 더 큰 문제를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2. 상대는 당신의 마음을 알지만 그 정도의 마음이 없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했는데.." 흔한 배신감의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했다고 해서 상대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의무는 없다. 내가 누군가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대도 나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 상대는 그 갸륵한 마음을 안다고 해서 꼭 거기에 응답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상대에게는 당신 말고도 그런 사람들이, 심지어 훨씬 더 깊은 관계를 오래 맺어온 사람이 주변에 널렸을지도 모른다. 정을 잘 주는 편인 나는 사회에서 늦게 만났건 어릴 때 학교에서 만났건 상관없이 사람만을 보고 같은 진심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딱 사회라는 맥락에 집중해서 이미 선이 그어져 있는  경우도 종종 만난다. 그럴 때마다 섭섭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를 나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그 사람 탓은 아니지 않은가? 어디서든 종종 인연을 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는 대신,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받는 쪽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둘 다의 여지를 차단하는 것을 택할 것인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자유이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한다고 상대를 원망할 수는 없다.


3. 상대는 당신의 마음을 잘 알기에 한다고 한 건데, 성에 안찬다.


결국 '잘한다, 못한다'는 것의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건 말았건 내 성에 안차면 서운한 것이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누구나 스스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의 기준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내 기준의 성에 차지 않으면 서운할 수밖에 없고, 그건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다. 이런 것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발생하기 쉬운 것 같다. 이를테면 부모가 자식을 그토록 사랑하는 만큼 기대가 크고 자식도 거기에 응답해주고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는 마음이 클 것이다. 그러나 항상 무엇을 어떻게 해도 자식들은 부모의 성에 완전히 안차고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마음과 기대를 잘 이해하고 본인의 기준에서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결과가 부모인 '나'의 기준에 못 미친다고 해서 아이가 '하지 않은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원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배우자는 여유 부리는 것을 몹시 좋아하는 성향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집안일을 많이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인데, 내 기준에서는 너무 안 하는 것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을 문득 느낀 적이 있다. (그는 혼자 있었으면 훨씬 더 게으름을 피웠을 게 분명한데도!) 상대가 성에 안 차는 것은 상대가 내 마음을 몰라서라기보다는 나의 그 '성'의 기준이 상대의 것보다 너무 높은 것일 수 있다. 상대의 진심을 의심하기 전에 내 기준이 상대의 것에 비해 너무 높은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 한다.



서운한 감정 때문에 멀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나도 감수성이 예민한 편(Sensitive 한 종족)이라 섭섭한 경우도 자주 있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그것의 진짜 귀인이 어디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경우 결국은 상대는 잘못이 없다. 섭섭함을 느낄지 말 지 경계가 되는 그 지점, 결국은 내가 설정한 것이다. 상대는 그것을 몰라서일 수도 있고, 알지만 내 기준에 맞출 생각이 없거나 그럴 능력이 안될 수도 있다. 상대를 바꿀 수는 없다. 결국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결정했다면 내 기준의 높이를 재설정하는 것이 맞을 것이고, 내가 타협을 할 수 없다면 관계를 희생하는 쪽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