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명물고기 Oct 15. 2020

커리어 우먼, 집으로 출근하다

가장 오래된 역사의 재택근무, 육아 체험기

"나는 육아가 적성이 아니라서, 회사가 그리웠어."

이런 말이 왠지 멋있어 보이던 때가 있었다.

꽤 오랫동안.


나처럼 회사가 잘 맞고, 야심도 있고, 실제로 인생을 걸쳐 시간과 금전적 투자도 많이 해왔고, 온갖 자기 계발의 대명사로 살아온 커리어 우먼이 육아가 잘 맞는다고 하면 왠지 컨셉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회인의 관점에서 쿨해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아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왠지 커리어를 조금이라도 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여러 인생 선배들의 전례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바꿔 먹기로 했다.

회사도 적성이고 육아도 적성일 수는 없을까?

이과에서 1등 하던 친구는 심지어 문과생들보다 영어마저 더 잘했었다. 솔직히 나는 공부에서 그렇게 균형적으로 다 잘해보지는 못했었지만, 이번에는 둘 다 적성에 맞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 못할 것이 뭐 있겠는가.


다만 두 개를 동시에 다 하면서도 둘 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겠다는 것은 화를 부르는 과욕이라고 생각했다. 육아 휴직을 하고 확실히 아기를 책임져야겠다고 결심한 초반 1년 남짓 기간만은 제대로 적성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보겠다는 것이다.



또한 회사에서 잘 써먹던 스킬육아에 적용할 수 있는 게 분명히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조리원에서 돌아와서 산후 도우미가 떠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예전에 어디선가 얻어둔 업무 수첩을 뜯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듯이 집에서 매일 출근하는 모드로 아침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래와 같다.


1. 체크리스트를 작성한다.


눈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오늘의 할 일을 다 나열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아침 첫 수유를 하면서 동시에 하는 일로 루틴을 만들었다. 굳이 안 써도 무조건 하게 되어있는 일상 기본 과제들, 이를테면 밥 먹기, 수유하기, 기저귀 갈기 이런 것들은 제외하고. 오늘 새롭게 생긴 일일 수도 있고, 어제 써둔 리스트에서 지워지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재택 육아 생활이 시작되면서 업무 수첩에 쓰는 것들은 예전처럼 더 이상 '앱 다운로드 데이터 뽑아 정리', '보고서 초안 만들기' 등이 아니라 '골반 스트레칭하기', '보험금 청구하기', '새로운 이유식 재료 준비하기', '사운드북 읽어주기' 등 전혀 다른 결의 과제들인데, 쓰다 보면 의외로 많다. 그리고 달성한 것은 바로바로 표시를 한다.


2. 아이템별 시간을 배분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위에 언급한 아이템들을 쓰면서 예상 소요 시간을 같이 표시한다. 예상 소요시간이 긴 아이템은 일단 무조건 후순위이다. 왜냐하면 긴 시간이 연속적으로 주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고, 혹시라도 주어진다면 그건 매우 감사할 일이지 당연한 이어서 달성 못했다고 짜증 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기가 낮에 한 번도 안 깨고 계속 연속적으로 30분 이상 잠을 자주는 절호의 기회가 갑자기 운 좋게 온다면, 허송하거나 뭐 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언제든 꺼내서 할 수 있는 희망 리스트를 잔뜩 나열해둔다. 이런 것들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밀린 단톡방이나 이메일 체크 등이다. 리스트의 내용과 소요 예상 시간을 보고 '나의 우선순위'에 따라 아기가 중간에 잠시라도 눈을 붙이거나 혼자 칭얼대지 않고 잘 놀 때 중간중간 해결할 수 있다.


3. 문제를 해결한다.


갑자기 육아라는 과업에서의 초짜로 업무를 시작하게 되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정말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기에 관련되어 매일 해야 하는 새로운 노동 중에 반복되고 발전될 것이 없는 것들은 퀄리티 보다는 속도에 초점을 맞추어 무조건 신속하게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다. 육아 외에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내가 마음먹는 만큼 해결된다. 예를 들어 피부 관리, 통증 관리, 건강 관리, 자기 계발 등. 아기 키우기도 바쁘니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그럴 것이다. 나는 각종 관리 리스트를 만들고 실제로 완벽하지는 못해도 하나씩 동시에 해 나가려 하고 있다. 실제로 아기가 커지면서 더 바빠질 일도 많고 또 새로운 과제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들여온 습관에 더하여 육아계의 노련미가 조금씩 더 추가되면서 지금까지 열심히 양립 중이다.



오히려 딩크족이 더 맞을 법한 나의 성향상 아기를 가지기 전에 나도 육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외국 친구들처럼 쿨하고 자기를 잃지 않는 육아는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직접 해보고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만큼 육아가 통제 불가능하고 나를 무조건 잃는 고약한 과업만은 아니라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었고, 일부 블로그에 조금씩 끄적이던 것들까지 끌어와 좀 더 다듬고 정제하여 나와 비슷한 성향의 후배들에게 희망이 되고 용기를 주는 글집으로 완성해볼 계획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환경 호르몬, 절대 잊지 않아야 할 이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