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외고, 연세대 경영학과와 의학전문대학원 나온 의사가 둘째 낳고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녀 주변의 아이비리그 대학 나와 전문직 하던 친구들도 열에 아홉이 커리어 포기하고 집에서 애 키운다고 덧붙인다. 21세기가된 지20여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기사가 나오다니 충격적이기도 하고 약간의 뻥이나 과장이겠거니 믿으며, 당시 기사가 뜬 날 점심을 먹으며 회사 친구한테 얘기를 했더니, "아 걔 내 동아리 후배고, 사실이야. 인터뷰했다더니 진짜 기사가나왔더라."라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렇게 미쳤을 때가 있었더랬지."
화려한 커리어를 다져서 30대 중반에 대기업 팀장까지 단 이 친구가 그 심정이 뭔지 자신은 정말 이해를 한다며, 한 때 본인도 당시에 일시적으로 헤까닥(?)해서 그간 공들인 커리어를 평생 포기할 뻔했단다. 애 낳은 여자들이 회사에서 뽑았더니 이렇다는 말이 나올까 봐, 혹여라도 나쁜 선례가 될까 육아 휴직을 연장하겠다는 그 한마디를 못해서 그냥 과감히 퇴사를 하였단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결정을 몹시 후회하는 데에는 단 2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잠시를 못 참고 일순간의 결정으로 본인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와 후회가 몰려올 때 쯔음, 다행히 그간 탄탄히 쌓아둔 커리어 덕으로 때마침 본인을 스카우트해 주었던 그 기업에 너무 감사한 마음이라고 한다. "안 그랬음 어쩔 뻔했을까"라는 말과 함께.
"정말 그 당시에는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그것만이 정답일 것 같은 어이없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건 다 한 순간의 맘 약한 생각이었어. 내가 왜 그랬을까."
아이가 크는 것은 한순간이고,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잠시 스쳐가는 성장의 한 단계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가 다 크고 나서 그때는 홀가분하게 내 인생을 다시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치열하게 살아온 유ㆍ청년의 나날들에 대한 응당한 자리 같은 것 따위는 결코 되찾을 수 없다. (물론 언제든 복귀 가능한 의사 등 일부 라이센스 중심의 직업은 좀 다를 수 있다.)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아무리 아이를 키우면서 엄청난 리더십과 멀티 태스킹 능력과 새로운 스킬셋을 키워왔다고 한들, 사회가 그때의 나를 보는 시각은 그냥 맘충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인 경단녀 아줌마에서 인생을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빠들은 옵션에 불과한 내 아이의 24시간을 엄마만 오롯이 목격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가? 이미 젖을 뗀 이후에는 엄마만 할 수 있는 돌봄 과제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즘은 아빠 육아 휴직도 가뭄에 콩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둘 중 하나가 커리어를 포기하라고 한다면 엄마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결국 '언젠가는' 사회로 편입되어 자기의 삶을 개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린이집이든 학교든 시기만 조금 차이 날 뿐이다.
"자식에 올인하여, 끝내주게 교육을 잘 시켜서 좋은 대학을 간다고 해도, 그 아이가 딸이면 언젠가는 또 다른 전업 주부, 아들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명망가
결말을 기본적으로 더 기대한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가?"
그럴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치열하게라도 살지 말고 항상 더 여유롭게 행복을 즐기기라도 하며 살던가. 우리가 더 열심히 못한 것에 속상해하며 날 밤을 새우며 공부를 해온 세월이 결국 또 다른 미래의 전업 주부를 키우기 위함이었던가. 단지 남자로 태어나서 덜 똑똑하거나 덜 열심히 살아왔어도 세상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기회가 있고, 여자이기에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왔어도 어느 순간 그냥 한 가정 안에서 한 두 명의 인생에 내 인생까지 목매달아 버린다는 것이 너무도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학업성취도는 이제 수학을 포함한 전 영역에서 전 세계적으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높은 실정이다. 하지만 이게 무슨 소용인가?
"너무 많은 책임감을 혼자만 다 뒤집어쓰고, 내가 다 짊어져야 한다고 지레 생각하지 말자."
당당한 맞벌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집안일의 총체적인 책임은 결국 내게 있다고 믿고 그렇게 주장하는 남편과 결혼 초기부터 소소한 충돌이 있어왔다. 다른 것에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도대체 이 무슨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역시나 그가 30년 넘게 봐온 세상, 굳게 믿고 살아온 사고방식은 쉽게 변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난 아직도, 아마도 끝까지, 그건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분명 '우리의 일'이다. 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치우지 않아서 거슬리는 게 있다면 거슬리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꾸준히 주입시켰다. 엉망이라 해도 그건 전적인 내 책임이 아니니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다.
사회가 불합리하다면, 그 부당함을 느끼는 우리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는 절대로 알아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꾸준한 암묵적 시위 혹은 정신교육 덕인지 임신하기 전부터도 결국 남편은 본인이 먼저 오면 밥도 해놓고, 내가 밥하면 설거지는 하고, 장도 거의 전담해서 보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입장에서는 40년이 걸렸고, 내 기준으로는 6년이 걸렸다. 앞으로 평생 같이 가야만 하는 육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분명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하고 복장 터져서, 또는 잠시 급한 김에 어차피 결국 '내'가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애초에 응당 '나'의 일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지레 먼저 생각해 희생양을 자초하지 말자. 그의 삶만큼 똑같이 나도 누군가들에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너무도 소중한 인생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그러니, 내 커리어만 희생하면 가정이 평안해진다 따위의 생각은 애초에 하지 말고, 힘들어도 '공동의 인생 과업인 육아'를 '각자 자신의 삶'과 같이 양립해나가는 솔루션을 어떻게든 '함께' 찾아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