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크게 크게
만약에 내게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꼭 저렇게 키우고 싶다 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의 순간들은 임신 준비를 하기 훨씬 전부터, 심지어 인생에서 결혼을 할지조차 확실치 않던 20대 초반 낯선 땅에서 느꼈던 것도 있는데 기억이 너무도 선명한 장면도 있다. 각 아이의 단계별로 내가 느꼈던 순간의 모습처럼만 자랄 수 있다면 아이도 나도 꽤나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유아기
수년을 딩크(Double Income No Kids) 상태로 매년 휴가철이면 외국에 나가 콧바람을 쐬던 때가 있었다. (이젠 아주 까마득한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들지만..) 늘 야근에 지쳐서 새벽에 대충 짐 싸고 바로 탑승을 하는 일정이었기에 매번 장거리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늘 주변 좌석에 어린 아기가 앉지나 않을까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내 아기를 만나기 전까지 내게 '아기'라는 존재는 '도저히 통제할 수없이 어디서 건 삑삑 울어대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한 번은 바로 뒷좌석에 아기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다가 한참 비행 중에 발견한 경우가 있었다. 그 애는 갓 걸을까 말까 한 정말 딱 봐도 '아기'였는데 자기 얼굴만큼 커다란 이어폰을 양쪽에 끼고 아주 평화롭게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아기는 탑승부터 착륙까지 단 한 번의 울음이나 칭얼거림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아.. 어떤 아기는 늘 빽빽거리지 않고 평온하게 통제할 수 있기도 하구나.' 나도 언젠가 아기가 생긴다면 아주 어릴 때부터 저렇게 불안보다 평온이 넘치는 아기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 아동기
나는 만 21살에 처음 비행기를 타보았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상용화되지 않은 그 시절 외국에서 나의 자생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일부러 혼자 프랑스 시골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파리에서 프로방스로 가는 TGV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중, 어린이 한 명과 부부가 다가오는데 내 옆자리를 그 어린이를 앉히고 부부는 앞자리에 나란히 타는 것이 아닌가? 아이를 앞쪽으로 지켜볼 수 있는 방향도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인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아이를 혼자 태우고 자기들은 앞에 앉는 것이다. 우리였다면 아마 99%는 앞자리에 아이와 엄마가 앉고 뒷자리에 아빠가 앉았을 텐데. 그것도 신선했지만, 그 뒤가 더 놀라웠다. 그 아이는 물어보니 6살이라 했던 것 같은데, 2시간이 넘게 가는 시간 동안 단 한 번을 앞에 앉은 부모에게 보채거나 성가시게 한 적이 없다. 창밖을 보거나 조용히 자기 가방에서 미니 오락기를 꺼내 혼자 간간이 하면서 지루함을 알아서 달래었다. 그리고 역에서 마주친 프랑스 어린이들은 걸을 수만 있는 나이면 예외 없이 다들 자기 짐은 자기가 하나씩 끌거나 메고 가고 있었다. 나도 훗날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독립적이고 씩씩한 아이로 키우리라 마음먹은 계기였다.
3. 청소년기
한국에서 알게 된 프랑스 친구(라고 하기엔 나이가 있는 퇴직한 아저씨)랑 밥을 먹으면서 하던 얘기 중, 그가 발견한 본인 기준에서 신기한 현상 중 하나는, 한국에서는 식당에 가보면 청소년기의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외식을 하는 경우를 만나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특히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저녁마다 온갖 학원, 독서실 등을 다니느라 부모님과 맛집을 찾아다니는 여유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고, 만약에 어쩌다 혹시 짬이 난다고 하더라도 또래 친구들을 만나기에도 너무 바빴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고민 상담 같은 것은 부모님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끼리만 나누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시절의 스트레스 역시 우리끼리 노래방을 가든 떡볶이를 먹든 하면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매우 어린 시절부터 독립적으로 키운 것 같은 프랑스 친구들은 오히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부모와 같이 맛난 것도 먹으러 잘 다니고, 고민도 상담하고 하는 것 같아 놀라웠다. 심지어 한 번은 프랑스인들의 와인 저녁 모임에 갔는데 마치 친구인 양 엄마와 같이 나온 20대 초반 아이도 있어서 놀란 적도 있다. 당연히 한국에도 그렇게 부모와 친구처럼 큰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프랑스에서도 원수지간 같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지만, 엄마의 친구 모임에까지 같이 가고 싶을 정도로 "친구 같은 부모"는 내 기준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 역시 우리 아이가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나, 고민이 있을 때 스스로 찾아가고픈 어른으로 크고 싶다는 커다란 소망이 있다.
4. 성인기
내가 아이를 가지고 기념으로 그 아이를 위한 선물로 산 것은 딱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임신이 확정되고 난 후 산 귀여운 아기 양말 두 쌍이었고, 하나는 아이 낳고 이름이 생긴 후 판 도장이었다. 도장 측면에 고심해서 각인을 해둔 문구는 "우리의 큰 기쁨(아이 이름의 한자 뜻), 엄마 아빠는 늘 네 편이야"였다. 이 도장에는 아이가 커서 스스로 일군 재산으로 등기를 치러 갈 때든, 중요한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든, 가슴 뛰면서도 뭔가 긴가민가 하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도 늘 든든하게 자신감을 갖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우리 아이도 역시 살면서 힘든 순간, 스스로 확신이 없는 순간,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꼭 이 한마디는 잊지 않으려 한다. "너를 믿는다." 아이는 자신에게 가장 옳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싶다. 그리고 더 나이가 들었을 때의 모습은 지금 남편 정도만 되어도 참 좋을 것 같다. 올해의 목표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올해는 양가 부모님들을 좀 더 많이 뵙고, 같이 여행도 한 번씩 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1순위야." 우리 아이가 컸을 때는 내가 무려 1순위까지 되길 바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연로해졌을 때쯤, 가끔은 나를 진심으로 먼저 생각해 주고 다가와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인생일 것 같다.
언젠간 이 아이도 한창 속을 썩일 테고 (지금도 당최 왜 밥을 안 먹는 거니..) 나도 그도 서로에게 인간대 인간으로 화가 나거나 상처 주고받을 일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나는 분명히 늘 그보다 더 어른이다. 그가 성인이 되든, 머리가 희끗한 장년이 되든 어쨌든 나는 그보다 늘 이미 40년씩이나 더 산 어른일 것이고 어른은 그만큼 어른다워야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