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홍대화실 정착기 3
바닥 스케치를 하고 나서, 초벌 칠을 할 때 나는, 거장에 가깝다*. 붓놀림이 거침없어, 말하자면, 그림으로 일필휘지 한다*. 색도 과감하고 얹고, 명암도 대범하게 정리해 준다. 아직 뭘 그렸다 할 수는 없는 수위의 작업이지만, 이건 영락없는 거장의 방식이고, 대작의 출발이다*.
마음은 거장, 실체는 초짜
그렇잖아도 대충 괜찮은 것 같은데, 초벌이라는 전제가 주는 기대감까지 더해져, 이때 나의 자존감은 과하게 부푼다. 내 숨겨진 재능이 오늘 폭발하나 보다 싶고, 곧 신성도 되고 거성도 될 건가 싶다. 급기야 그림 그리기에 헌신을 다짐하려는 즈음에 화실 시간이 끝난다. 조금만 더하면 가닥이 보일 것 같은데, 참 아쉽다. 더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한번 끊고 가야겠다.
한번 끊어가는 것으로, 다 끊어졌나? 다시 자리 잡고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면, 그림은 순식간에 망가진다. 색 하나 얹을 때마다, 붓 한번 닿을 때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계속, 점점 더, 망가진다. 덩달아 나도 망가진다. 나는 전번의 의기양양함과 의욕을 깡그리 잃고, 삐뚤어진다. 그림 같은 거 정말 하기 싫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대체로, 좌절이다. 형태에, 색에, 터치에, 뭐 하나 맘대로 되는 게 없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또한, 버티기이다. 맘 같지 않은 내 실력에 좌절하면서도 끝내 때려치우지 않고 버티기. 그렇게 버티면 결국 끝은 있다. 그게 뭐든.
맘 같지 않고, 말 같지 않다
그 '뭐'들 중에서 실패작을 좀 보자면 이렇다.
III 낭패 정물화(모작) 원작 자체가 구성이 간단하고 기법이 러프하니 따라 하기 쉽겠다고 부담 없이 성큼성큼 시작했다가, 쩔쩔매며 끝냈었다(혹은 접었거나). 배경을 컴컴하게 뒤로 쭉 빼고, 디테일 대신 명암으로 형태 잡고, 하이라이트 딱 넣으면 되겠네 자신했는데, 그게 뭐라고, 다 맘대로 안됐었다.
배경을 뒤로 쭉 빼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배경색을 수차 뒤집었는데도 배경과 정물이 확연이 분리되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의 도움이 있었다. 아주 과감하게 진한 색을 쓰셨는데, 아! 저렇게 확 하는 거구나 배우는 게 있었다. 디테일 없이 형태를 잡는 것은 디테일로 형태를 잡는 것보다 힘들었다. 붓질할 때마다 용기의 좌우 대칭이 어긋났고, 명암은 그 형태를 더욱 뒤틀었다. 한참 고전을 했다.
III 낭패 풍경화 다리 밑으로 파고든 노을의 사광이 뿜어낸 다채로운 온 색과, 사광이 만든 면 간의 쨍한 대비가 그림으로 먹어줄 것 같아 시작했다. 맨 앞렬의 기둥을 선명하게 잡고, 강 건너 기둥과 그 너머의 풍경은 과감하게 날려서 그리자, 그러면 강약 강렬한 희뜩한 풍경화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다시피, 그게 또, 그렇게 말 같이 되는 게 아니었다.
일단, 색이 너무 어려웠다. 뭘 해도 내가 보는 색을 낼 수가 없었다. 희고, 노랗다가 붉어지는 게 다인데, 그런데, 내가 쓰는 단조로운 색 배합으로는 빛에서 나온 노랑과 주홍의 투명감이 살지 않았다. 노을빛이라기보다는 기둥의 페인트칠 같았다. 색이 탁했다. (그러다 자각한 것이지만, 이때까지 나는 물감 사용에 좀 찌질했다. 다양한 물감을 짜지도 않고, 많이씩 짜지도 않고, 심지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끝낼 때쯤 되면 팔레트에 남은 물감을 다 쓰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다음은 디테일. 디테일 살리는 게 아니라, 날리는 게 너무너무 어려웠다. 생략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내 말은, 꽃을 꽃으로 그리지 않아도 꽃으로 보일 수 있는 게 그림인데, 나는 꽃도 꽃으로 그리지 않고 꽃으로 보이게 하는 게, 혹은 꽃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헉헉 혀 꼬인다), 여튼 그게 안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보니, 결국 기둥에 난 잔 금부터, 다리 아래 돌 둑과 심지어 다리 건너 아파트 창까지 그려 넣고야 말았다. 부족한 것을 디테일로 잡아 보려는 초보적 태도인 거지. 에잇.
시간이 필요한 일
저것 말고도 실패작들은 꾸준히 생기고 있고, 그 실패작들로 나는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 전반적 비례감이나 채도 조절 같은 건, 이제 그럭저럭 좀 나아진 것도 같다. 그러나, 하나,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것은, 바로 생략이다. 꽃을 꽃으로 어쩌구 그거 말이다. 내 보기에 그건 고수의 영역이다.
생략은 어렵다. 초짜는 그렇다. 뭘 버릴지 알지 못하고, 정작 안다 해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오래 들여다 보고, 자꾸 그려보고, 한참 걷어내야, 겨우 되는 일이다. 그림 하나에 그렇게 하고, 그렇게 그린 그림이 쌓일 만큼 시간을 들여야 되는 일이다. 그렇게 시간을 들이는 동안, 대상의 주부를 분리해 내는 통찰력이 생기고, 부를 걷어내는 결단력이 생기고, 부 없이 주를 살리는 표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생략한 묘사가 정밀한 것에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의 나로서는 생략 쪽이 더욱 멀어 보이고, 그래서인지 내게는 그쪽이 더욱 매력적이다. 내게는 그게, 잠깐 적고 종일 지워 시를 쓴다는 시인의 고백이나 힘 빼고 하라는 노선배의 조언과 맞물리는, 경외와 선망의 영역이다. 음... 말이 너무 나갔나? 실은 그저 절대 연습량 얘기일지도? 10호 캔버스 10개도 아직 못 채운 나는, 그냥, 닥치고 그림?
닥치고 그림!
내 기준으로 생략의 고수인 분의 그림을 베껴봤다. 슥슥 그린 것 같아 보여, 많은 초짜들이 이쯤은 나도라고 자신하지만, 정작은 모작으로도 쉽지 않다. 그럴만두지, 이 빠르되 여유로운 붓질이 있기까지 고든 선생이 들인 시간이 얼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머리에, 눈에, 손에 밸 만큼 많이 그리고 많이 버리지 않았겠나. 그러니 나는, 다시 한 번 닥치고 그림!
* 뭐라고 써도 극과장이라 민망, 그저 수사라 치고 넘어가도 될까? 민망함에 달아보는 무효한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