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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IU Oct 08. 2016

이런 식의 화해

구상과 결과의 간극

미안이 한자어였다. 未安. 

未安 미안은 남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음이란다. 그래서 和解 화해는 그 불편을 풀고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이란다원래 뜻이 저랬다니... 이런 지혜로운 선조들 같으니라고. 


누군들 아닐까 만은, 나도 오랫동안 지고 사는 '미안'한 기억들이 좀 있다. 이 기억들은 대체로 나의 후진 면모가 드러난 사건들과, 그걸 목격하거나 그에 연루되면서 불쾌를 겪었을 사람들에 관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장면들이다. 그런 기억들은 한밤에 켠 스마트폰처럼 쎄해서, 들여다보려면 눈이 아린다. 스마트폰은 눈이 아려도 참고 보는데, 그런 기억들은 서둘러 눈 감아버리고 만다.  


미안의 기억들은, 좀 꺼내서, 그 쎄한 형광의 색을 좀 날려야 한다. 고해의 창살문에든, 수다의 테이블에든 일단 꺼내놔야 한다. 꺼내 놓으면 색이 좀 바래고, 색이 좀 바래고 나면 들여다보기가 나으니까. 들여다보면 뭐... 당장은, 그때 나 정말 그지 같았네 화끈하며 면구스러운 마음으로 아린 눈을 당장 감고 싶지만, 참고 좀 더 들여다보면, 변명이랄지 오기랄지, 좀 뻔뻔한 마음이 생긴다.


우린 다들 웬만큼은 후지고, 그런 만큼, 웬만한 타인의 후짐에는 다들 내성이 좀 있을 거다. 그러니 작심한 위해가 아닌 이상, 평생 지고 갈 미안은 없을지 모른다... 라고 부러 생각하면, 용기가 좀 난다. 그렇게 용기가 나야, 미안한 손 내밀고 화해를 청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 미안은 불편이고, 그건 공히 겪는 마음이다. 내가 미안해 마음이 편치 않은 동안 그들도 마음이 편치 않을테니 '미안'하다. 그러니 미안을 빨리 끝내는 것이 미안을 초래한 쪽의 도리다. 어떻게든 미안을 풀고자 화해를 청해야 하는 이유다. 그게 낫다. 혼자 지고만 가는 미안은 소용없다. 


미안을 끝내고자 화해를 청하는 것이 미안을 초래한 쪽의 도리다    


미안한 마음이 되어 소원해진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들척이던 지난여름에 내 그림의 화두는 [화해]였다. 다들 화해로 보아 주지 않는 바람에 나도 부인하고 말았었지만, 이제 말하건대 이 그림의 제목은 화해이다!


화해의 손. 화해를 청하는 손. 간신히 용기 내어 (바들바들...) 화해를 청하는 손, 그리고 마주 내민 손. 오, 이런 따뜻하고 평화로운 장면이라니! 제목으로 치면 '경음악'이라도 깔릴 만 한데, 보다시피 이 그림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하다. 누구 말대로 차고 격하다. 대체 왜!   


구도를 잡을 때부터 말이 나왔다. '가로로 안 그리고?' '아. 그러게요.' 세로로 클로즈업한 구도인 데에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보면, 이때 이미 화해의 '和'를 말아먹었지 싶다. 어딘가 편치 않은 구도다. 그다음 내 행보는 굵고 진한 밑그림. 그 역시 대단한 이유는 없다. 전작도 그랬었다 말곤. 여기에, 마침 팔레트에 남아있던 빨강으로 밑바탕을 얹자, 화실 친구들이 참고 있던 우스개를 터뜨렸다. '화해라더니, 선동아니냐', '운동권 걸개그림이다', '노사 화합 포스터다' 뭐 그런... 

그들의 ㅋㅋ에 난 ㅠㅠ

당과 인민의 화합을 도모하냐는 조롱을 샀던 밑칠 단계. 누차 말하지만 그냥 초벌이었다구요.


화해를 그리고 싶었던 초짜 연습생은 그렇게 세상과 불화를... 빚은 건 아녔고, 그러기 전에 나는 온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세상에 화해를 청했다. '和'라면 어울릴 법한 파스텔 톤의 그라데이션 바탕은, 그렇게 시류에 영합하고자 택한 나의 절충안이었다. 그런데 나도 참... 하필 처연한 푸른색이라니. 

아 놔... 이번 생은 아닌가 보다.  

빨강 빼고도, 끽해야 노사 화합 포스터 정도라고들...  이때 마음을 비웠다. 그래, 이번 건 글렀어.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화룡에 점정 하신 분은 우리 선배. 세상의 몰이해로 인한 상처를 좀 위로받고자 찾은 선배는 급기야, 나의 부부관계에 의혹을 제기하며, 갈망이 읽힌다는 현학적 의견과 내 결핍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안타까움을 전했다. (좋아요 결핍입니다...)


근데, 골 난 마음을 잠깐 접으면, 선배의 말은 생각을 부추긴다. 선배의 해석대로, 그림이 이 모양인 것은, 나의 화해가 그처럼 다급하고, 나의 미안이 그처럼 절박해서였을까? 이 싸하고 격한 것이 나도 몰랐던 내 식의 화해인 걸까? 내가 구상한 화해와 표현된 화해 간의 간극은 스타일과 우연을 매개로 드러난 내 잠재의식 때문인 건가? (냉정하게 보자면, 지금의 내 구상과 결과의 간극은 내 특성의 발현이라기보다는 그저 기술 부족에 기인한 구현의 실패로 보는 게 맞겠다만)


더불어 소환되는 내 오래된 질문은, 작가를 걷어내고 작품을 보는 게 어떤 건지 - 되는 건지, 맞는 건지 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이중섭의 유난한 사연을 대입하지 않으며 그의 작품을 보면 (그럴 수나 있나? 그럴 이유나 있나?) 어떨까. 지금의 이 전적인 극찬은 그대로일까. 많은 영웅이 마케팅의 산물인 시대인지라, 내 감동의 일부가 정당치 않은 건 아닐까, 전시회를 보는 동안 괜한 주저를 했었더래서 말이다.


흠...


화해라고 그린 이 그림은 나와 세상의 불화(?)가 되고, 그림에 대한 입장 정리라고 쓰는 이 글은, 정리 안된 채로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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