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져 타로 카드 중에서 16번 위치를 부여받은 '타워'는 22장의 카드 중에서 화성의 위력을 가장 잘 나타낸다. 알프레드 노벨을 떠올리게 하는 타워의 이미지는 스미스-웨이트 타로덱에서 웅장한 폭발 그 자체로 묘사된다. 어두운 밤을 찢는 번개와 전기적 마찰에 의한 불꽃, 뭉게구름 같은 연기, 높은 성에서 추락하는 사람들, 날아가는 왕관. 긴급한 위기다. 응급 상황이다. 미스티컬 모먼츠를 그린 카트린 웰즈 슈타인은 붕괴되어가는 성을 가슴에 안고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일어나는 파괴를 잔잔히 수용하는 듯한 여성으로 표현했다. 가이안 타로의 작가 조안나 파웰 콜버트는 벼락을 맞은 나무에서 불길이 치솟고 이 빛은 추락하는 사람들을 환히 비추는 그림으로 완성한다. 재미있었던 점은 그럭저럭 타로 리딩이 원만해질 무렵 타워 카드가 나올 때마다 내 귓가에서는 환청처럼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곤 했다.
사실 타워는 '소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무엇인가가 깨지거나 쨍할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을 가리킨다. 분노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빠르고 격정적이다. 목울대로 커다란 감자가 올라와 결국 통곡해버리는 사람들은 터지는 울음을 참느라 끅끅거리기도 한다. 록밴드는 전기적 장치를 통해 사람들의 고막을 찢으며 열광을 유도한다. 앰블런스의 커다란 사이렌소리는 긴장감을 가져온다. 타워는 샴페인과 같다. 억지로 참고 눌러왔던 모든 것들이 밀봉된 뚜껑을 열자마자 폭발음을 내며 쏟아진다. 물론 쏟아지는 거품이 아름답기만한 것은 아니다.
벼락이 선사하는 섬광 속에서 추락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비리에 얽힌 공직자를 상징하지 않는다. 천식환자가 내뱉는 가래나 설사를 누지르는 것 또한 타워다. 타워는 부패건 질병이건 배앓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기품 있는 왕관' 즉 자존심을 비웃듯 날려버린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권위나 체면들. 우리가 평온하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환상이었음을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고 소란스럽게 고발하는 셈이다. (그래서 타워는 권력을 해체하는 민중의 반란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난 날 깨닫지 못했던 사태의 진실을 시간이 흐른 뒤 깨달았을 때 격렬하게 밀려드는 후회나 탄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난동의 끝자락은 결코 눈물로 끝나지 않는다. 허탈하게 빈 공간으로 카타르시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분노나 슬픔은 불에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된다. 알갱이처럼 남은 영혼은 울다 지친 아기처럼 연약하고 순수해진다. 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분리수거를 통해 쓰레기장에 모인다. 가치있는 것들을 배달했지만 이젠 쓸모없는 택배상자를 마당에 버리는 것처럼. 인생에서 필요없는 껍질을 버릴 때가 왔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대청소가 마무리된다.
우솜돌은 우솜과 돌의 합성어이다. 우솜은 '웃음'의 엣말이다. 돌은 '튼튼한 아이'라는 뜻에서 웃음 짓는 건강한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떠나기 전 삼개월 동안 우솜돌로 불렸다. 이전 이름은 '숲돌이'였다. 워낙 소란스러워 숲처럼 고요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우솜돌이 분리불안증을 앓기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 슬개골이 탈구되어 수술을 받은 이후다. 수술 받았던 병원이 24시간 운영하는 병원이 아닌 개인 병원이었다. 우솜돌은 밤이면 불빛 한 점 없는 실내에서 어둠의 공포와 싸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게다 일주일 동안 가족들과 면회도 하지 못한 채 좁은 케이지 속에서 갇혀지내야만 했다.
퇴원 이후 우솜돌은 별 탈 없이 걷고 잘 지내는 듯 했다. 우리 가족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개엄마-개할무니였던 나와 아이들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새로 이사간 집은 이전에 살았던 흙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러나 내가 거실문을 잠그고 나가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홉 아이들의 떼창이 시작된 것이다. 그 소리는 전봇대 위에 앉은 까마귀들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숲을 흔드는 태풍 소리 같기도 했다. 동네가 술렁였다. 주동자는 물론 우솜돌이었다. 그의 울음 소리는 의외로 하이 옥타브였다. 단순한 하울링이 아니었다. 첫 소리는 금방이라도 까무라칠 정도로 긴급해 보였다. 세상의 어떤 개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울부짖음이었다.
소리는 금방이라도 죽어나자빠질 정도로 위급하게 깨갱이다 우우 부드럽게 처연해지고 갑자기 컹컹 성을 내면서 우오오 지하실에서 울려퍼지듯 웅장해진다. 변주곡도 이런 악명높은 변주곡이 없다. 파가니니가 온대도 이런 제멋대로 변주곡을 연주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나머지 여덟 아이들이 내는 합창이야말로 뒷목을 잡을 정도로 가관이었다. 그 소리는 마을 입구까지 멀리멀리 퍼졌다. 개통령이 출연하는 티비 프로그램을 눈이 빠져라 돌려보며 우솜돌의 분리불안증을 고쳐보려 노력했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들어오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다시 나갔다 들어오기를 오랫동안 반복했다. 물론 우솜돌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리에 알통이 생길 정도로 왔다리갔다리 하는 할무니를 불쌍히 여겨 입을 다문 적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저녁 외출을 위해 예의 분리불안 극복을 위한 연습을 시작했다.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다 시간을 점점 줄이며 대문 앞에서 우솜돌을 몰래 관찰했다. 어쩐 일인지 잠잠했다. 성공인가! 마음 속으로 개통령 따봉을 외쳤다. 차를 주차한 마을 입구까지 살금살금 걸어오는데 갑자기 폭죽이 터지는 듯한 울음 소리가 들렸다. 우솜돌이었다. 뒷목이 뻣뻣해졌다. 동시에 내 눈 앞에서 무언가가 번쩍거리더니 눈 앞이 환해지는 기이한 순간을 경험했다. 이웃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아이들을 다독이며 조용히 살고자 노력했건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이웃들의 항의는 없었지만 당연히 그들을 배려해야만 했다. 새로 이사간 마을 주민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한편으로 개를 키우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악화될까 스스로 위축되어갔다.
사실 이웃들은 별 말이 없었다. 그들은 사는 게 바쁜 사람들이다. 저녁에는 티비를 크게 틀어놓고 낮에는 밖에 나가 농사를 짓는다. 나만큼 그들은 예민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동네에 폭탄을 터트리는 것만 같았다. 조용히 살고 싶었다. 나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의 떼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 대부분 가라앉곤 하는데 그날따라 우솜돌은 길게 울었다. 옷을 갈아입다 그만 행거를 밀어 넘어 트렸다. 공장 노동자는 오늘도 지쳤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지금 몇 년 째냐고!" 아이들을 쫓아냈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들은 모두 귀를 뒤로 젖히고 두렵고 슬픈 눈으로 납작하게 마당 위를 기어다녔다. 문을 쾅 닫아버렸다. 언젠가 한 번은 바깥에서 기분이 영 별로인 채 집에 들어섰다. 아마도 사무실 직원과 신경 곤두세우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억지로 태평한 표정을 지으며 모른 척 하는데도 나를 본 우솜돌이 깨갱깨갱 울고 있다. 견디지 못하겠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에게 큰걸음으로 직진했다. 마루에서 큰 소리가 나도록 마구 발을 굴렀다. 분노가 터져나왔다. "제발 조용히 좀 해, 조용히 하라구, 쫌!" 우솜돌은 순간 낑낑대며 배를 뒤집고 벌벌 떨며 두려움을 표현한다. 이런 순간, 이런 나. 절망이다.
권력이란 것이 반드시 힘을 가진 특정한 소수를 일컫지 않는다. 일상에서 내가 누군가를 통제할 권리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권력자가 된다. 권력은 타협이 필요없다. 내가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파괴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가족 내부에서 나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 또한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성향이 강하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돈 버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희생하는데! 너희들이 말을 안 들어? 그렇다면 맞아도 싸지!' 인간이 취하는 분노의 몸짓을 동물들은 매우 빠르게 파악한다. 폭력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은 더 강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갇혀 있으니까. 사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한평생 갇혀 있는 셈이다. 인간들처럼 도망치거나 공권력을 요청할 수도 없다.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감지했을까? 무자비한 독재자로 기억할까? 두려워하던 마음이 치유되었을까?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잠시 흐릿해지거나 둔감해질 뿐이겠지. 나는 마음이 늘 산만했으며 몸이 자주 지쳤고 아이들과의 소통에 게을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막막했다.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책임감도 버거웠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성향이었다. 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데. 어떤 이들은 느껴봤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들...즉 나는 이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아이들이 내 곁에 있어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불안하고 취약했다.
우솜돌은 슬개골 탈구로 입원한 일주일 동안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어린 시절부터 적절한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은 분리를 몰랐다. 우솜돌만 '나홀로 입원'을 경험했다. 분리에 대한 공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울링은 아이들 사이에서 바이러스처럼 전염됐다. 잠시나마 개들과 떨어져 있는 연습을 일상적으로 해야만 했다. 나 스스로 연습이 많이 부족했다. 타로를 어느 정도 접하다 보면 직관이라는 것이 생긴다. 혼자 공부하면서, 너무나 어리석게도 수없이 헤맸던 탓에 역설적으로 직관이란 것이 조금 발달하게 됐다. 직관은 진실에 빠르게 다가가는 힘이다. 궁예가 자랑하는 천부적인 독심술이 아니라 상대방의 행동과 속마음을 왜곡하지 않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우솜돌의 타워가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됐다. 그의 통곡에 가까운 하울링은 오히려 굉장히 따뜻한 메시지였다. '어디 갔었어? 궁금해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어, 할무니.', '제발 나가지 마, 바깥은 무서운 곳이야.', '할머니가 안 보이면 걱정돼 죽을 거 같어.', '내가 지켜줄게, 제발 나가지 마.'
폐종양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서 보내준 동영상 속에서 우솜돌은 여기저기 정신없이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핏보면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개가 재빠르게 이곳저곳을 탐색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병원 측에서는 수술이 잘 됐다는 증거로써 보내준 동영상이지만 나는 보자마자 우솜돌이 도망갈 구멍을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음 속 깊이 우솜돌의 불안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퇴원하는 날 우리는 수술하기 전날처럼 대우아파트 앞 벚나무가 만발한 강둑을 걸었다. 일주일 뒤 실밥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남편의 아파트에 우솜돌을 맡기고 돌아왔다. 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부터 우솜돌은 끊임없이 낮고 서럽게 울었다. 그는 나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다섯 시간을 달려 집에 막 도착한 내가 곧바로 차열쇠를 쥐고 고속도로를 탔다. 몸과 마음이 전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났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나를 그리워한다는 것.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했다. 우솜돌, 조금만 기다려! 마음이 애잔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만났을 때 그의 입술은 허옇게 말라 부르텄다.
우솜돌이 무지개 다리를 건넌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급한 상항이어서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방문조차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 검사가 끝나자 환자가 잠든 틈을 타 몰래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대문 앞에 차를 주차했다. 정신없이 바빠 몰랐는데 능소화가 작은 폭포수처럼 우수수 꽃잎을 떨구고 있었다. 대문 열쇠를 찾다 문득 집 뒤에 방패처럼 둘러진 소나무숲을 봤다. 숲과 집지붕을 연결한 밤하늘에 자연스레 눈길이 머물렀다. 검은 소나무숲 위로 북두칠성이 떠 있다. 대문 틈으로 아이들 방의 병아리색 스탠드 불빛이 보인다. 쌩돌이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면 우솜돌은 귀신처럼 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그곳은 지금 텅 비어 있다. 낑낑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나 환청이다. 우솜돌 없는 집 지붕 위에 국자별이 반짝인다. 고마워, 우솜돌. 살아있는 동안 늘 기쁘게 사랑해줘서...순간 뜨거운 기운이 훅 올라온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뜨거움이다. 눈물이 뽀얗게 고인다. 폭죽이 소리없이 팡팡 터진다. 화성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