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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지타 Sep 22. 2024

우리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내가 내 삶을 선택했고 그에 따른 책임감을 느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아이들의 복지를 향상시킨 것은 아니다. 복지에는 항상 계획과 예산과 인력이 필요하다. 가성비가 가장 좋은 선택은 산책이었다. 산책은 나 혼자서도 몸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름값 정도만 있으면 된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가까운 논바닥으로 갔다. 여덟 아이를 두 팀으로 나눠 네 아이씩 함께 걸어다녔는데 아이들이 잘 따라와줬다. 나머지 한 팀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빠듯한 출근 시간이다. 거기에 더해 평발인 나는 조금만 걸어도 발바닥이 아팠다. 산책은 중단됐다. 아이들은 주말에나 학교 운동장에서 뛸 수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이상 내 직업 목록에서 공장노동자를 완전히 삭제해버렸다. 낮부터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추가되었고 고향 근처의 집으로 정착하고 나서야 아이들의 산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이가 열 살이 넘어가는 노령견들이 매일매일 산책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10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준 덕분이었다. 


중성화 수술을 마친 우솜돌은 자유로워 보였다. 발정기 스트레스가 줄어들어 예전보다 명랑해진 느낌이다. 특히 산책할 때 그러한 느낌을 확연히 받는다. 우솜돌을 시작으로 다롱이, 보늬의 중성화도 진행했다. 늦었지만 개운한 기분이었다. 사실 우솜돌을 관찰하며 느낀 것이 있다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 사회에서 적당히 개방된 환경이야말로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분명해 보인다. 우솜돌이 보늬를 물어뜯는 원인이 반드시 '입원 트라우마'나 '발정기 스트레스'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들 중에 어떤 아이들은 눈에 띄지 않는 우울증을 앓는다. 이 우울증의 다른 이름은 지루함이다. 


나와 함께 사는 반려견들은 드넓은 밖이 아닌 밀폐된 공간 안에서 여러 마리의 개들과 산다. 밀집 스트레스를 겪을 수 밖에 없다. 아이들끼리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가는 편이었지만 충돌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인간은 나가고 싶을 때 제 발로 걸어나가고 혼자 있고 싶을 때 공원이나 카페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다. 코로나 이후에는 ‘자발적 나홀로’였다.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누군가 밥을 줘야 하고 문을 열어줘야 하며 줄에 묶인 이후에나 밖에 나갈 수 있다. 관계가 불편한 아이와도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 우솜돌처럼 말썽을 부려 독방에 갇히지 않고서야 홀로라는 것이 여의치 않다. 그나마 집에는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마당이 있지만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였다. 인터넷을 누비며 찾고 찾은 질 높은 사료, 의료적 처치, 깨끗하게 끓인 식수, 인간의 애정이 담긴 손길은 필수지만 그것만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에 게으른 이와 함께 사는 반려견들은 스트레스가 많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야성의 부름이 있다. 각 자 기질이 다르지만 분명 대문 밖을 나가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탐색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아무 것이 있다. 도로, 아스팔트, 빌딩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자동차, 독극물, 굶주림, 포획망, 지자체 보호소의 안락사 약물이 떠돌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반려견들은 대부분 번식 공장 출신이다. 어미가 강제로 새끼를 낳아 새끼 때부터 펫샵으로 팔려온 상품견들이다. 인간들에게 귀여움을 제공하면 주택 내부에서든 아파트에서든 먹이를 공급받고 죽을 때까지 일정한 공간 안에서 갇혀 살아내야 한다.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자 인간의 애완 도구로 개량되어 쓸모가 바뀌어버린 탓에 이들이 애타게 바라보는 건 집사에 대한 맹목적인 기다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이 아이들의 일상이자 일생이 아닐까?  


극단적인 측면일 수는 있으나 그러한 생각에 이르자 우솜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정신 세계를 확연히 들여다볼 순 없지만 슬개골 수술 이후 불안과 공포, 스트레스를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많이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우솜돌은 나에게 통제와 지배의 대상이었다. 나 스스로 개의 입장이 되려 노력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산책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다. 그래, 우솜돌과 함께 걷자. 산책이야말로 우솜돌을 괴롭히는 불안의 고통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를 처음 사귀는 꼬마처럼 아이들과의 관계를 조금씩 배워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할무니’라는 호칭은 처음부터 인간인 나 위주의 위계일 뿐만 아니라 개와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미리 설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퇴근하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할무니 왔다!'이랬으니 우솜돌은 나의 진짜 이름이 ‘할무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솜돌은 산책할 때 맵시 있게 걷는다. 엉덩이를 적당히 뒤뚱거리며 걷다가도 왼쪽 다리를 가끔 실타래를 감아올리듯 공중에서 한 바퀴 구르는데, 마치 기차가 출발할 때 바퀴를 느리게 굴리다 속도가 붙으면 갑자기 빠르게 회전시키는 것과 같다. 슬개골 탈구 때문에 수술을 한 왼쪽 다리를 풀어주는 동작 같았지만 가슴으로 공을 받은 뒤 곧바로 슈팅을 하려는 축구선수처럼 멋지게 느껴졌다. 산책 도중에 가끔 고집을 피우며 안 가겠다고 버틸 때도 있었으나 나와 호흡이 꽤 잘 맞았다. 특히 우솜돌은 산책에 대해 자신의 기분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는데 늘 신이 난 표정이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언제나 앞장서 걸었다. 여자 아이가 친구집에 놀러가다 깽끼발을 짚으며 신나하는 모습 같다. 차에서 내리면 몇 미터 못 가 시계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다 똥을 누었고 다 눈 이후에는 또 무에 그리 신이 나는지 짝다리로  뛰어간다. 그럴 땐 모든 순간에 가슴이 열린다. 


동화의 핵심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살고 있는 마법의 세계다. 아이들은 동화를 버려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법의 세계를 버리도록 강요받아 왔으니까.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 천진난만함은 쓸모가 없다. 어른들은 말한다. 천진난만한 것이 더 나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생존할 힘이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마법이 사라진 세계에서 언제나, 늘 동화를 소환해주는 것은 개나 고양이와 같은 주변 동물들이었다. 그들이 동화 속 주인공인 이유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어도 누군가의 마음을 물거나 할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만이 가진 치유 즉 마법의 힘이다.  


산책은 내 삶의 큰 행운이었다. 언젠가 나는 걷기 명상이라는 것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똑같아 보이는 들꽃, 나뭇잎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모두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삼라만상들이 제각각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보니 몇 년 전 산책하던 일이 떠오른다. 우솜돌과 함께 걷다 강에 조각처럼 둥둥 뜬 철새들을 바라보는 조망대에서 잠시 쉰 적이 있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우솜돌에게서 어떤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당황했다. '이건 뭐지?' 난생 처음 개가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솜돌은 분명 웃고 있었다. 혀를 내밀고 있지도, 헐떡거리지도 않은데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웃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잔잔하게 타는 장작불처럼 웃고 있다. 은밀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전갈자리 우솜돌. 저 아이는 언제부터 나를 좋아하게 됐을까? 아니,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잘해주기는 커녕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때리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여줄 수 있을까? 그의 사랑은 단 한 번도 틀림이 없었다. 우솜돌은 나의 사유재산에 관심이 없다. 그는 나의 사회적 지위를 모른다. 나에게 보내는 질병의 증상을 방치해 죽게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암이 두려워 남편에게 맡기려 했을 때도 그 사랑은 틀림이 없었다. 부처님도 우솜돌의 사랑을 따라오진 못한다. 그가 나와 함께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는 것이 좋았다. 어둠처럼 무지해서 사랑에 밝은 우솜돌. 


산책을 해도 분리불안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여러 아이가 동시에 산책한다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져 두 아이를 차 속에서 대기시켰다. 남겨진 한 아이는 우솜돌이었고 결국 낑낑대다 울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다른 아이들을 먼저 산책시키고 있는데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가만 들어보니 울음 소리가 섞인 "하무이!"였다. 귀를 의심했다. 이건 '할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아닌가. 우솜돌이 "하무이"라고 다시 한 번 내지르며 열려진 자동차 유리창을 타고 넘어 내게로 미친 듯 달려왔다. 이젠 하다하다 구관조까지 된 것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개의 언어 모방과 발성 능력에 관련한 논문이라도 써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함께 걸으며 생각했다. 넌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냐. 지난 전생에서 나를 만났던 적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날 찾아온 거야? 아니면 내가 너를 찾은 거야? 정답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나. 걷기 명상이 준 교훈이다. 


일주일 전 집 뒤 야산에 가시박이 너무 많이 퍼져 집 담벼락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에 넝쿨과 잡초를 정리해야만 했다. 예초기 점검을 맡기러 예전에 살았던 읍에 갔다. 점검을 마치고 집에 가려다 아이들과 자주 갔던 공원에 들렀다. 긴 휴가가 시작되는 첫 날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야산을 다듬어 만든 소공원은 크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대나무숲 아래 이르렀을 때 발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미래에 와 있다. 그 미래는 아이들이 모두 떠난 이후의 미래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나홀로 산책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 없는 산책은 외로운 나, 홀로된 나를 가로등처럼 또렷하게 비춘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야 나와 함께 걷는 산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산책은 관계를 시작하는 처음이자 관계를 완성시켜 주는 마지막 놀이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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