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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지타 Oct 06. 2024

작고 희미한 빛들

시츄 순돌이는 번식의 여왕이었다. 처음에는 바깥에 나가 연애 사고를 쳐 다섯 아이를 낳더니, 나중에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 중 누군가와 근친교배를 맺어 아이들 셋을 더 낳았다. 단추와 보리, 순두부가 그 아이들이었다. (다른 방에 분리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창호지를 바른 전통문을 부수고 사건을 벌인 용의자가 누구일까?)사고가 벌어진 줄도 모르고 당시 나는 한진중공업이 바라보이는 부산 영도대교를 지나 김진숙을 살려내자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우리집에서 입양간 아이들 이름은 단추와 보리. 다행히 두 녀석 모두 인품이 넉넉한 지인들과 연줄이 닿았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단추는 고스톱하는 엄마, 아빠 옆에서 북극곰처럼 앉아 광을 파는 폼새였다. 


보리는 이름대로 자신의 운명을 따라갔다. 성실한 원불교도인 지인의 집에서 무럭무럭 잘 컸다. 먼 훗날 보리가 열반의 세계로 떠났을 때 지인은 촛불을 켜고 사십구재를 지냈다. 어느 날 기도를 마친 뒤 초에서 떨어진 촛농을 찍은 사진을 보내오면서 그는 말했다. “기도할 때 우리 보리가 다녀갔나봐요. 떨어진 촛농 모양이 보리 발이랑 똑같아요.”  상실을 이겨내려는 그의 건강함에 비로소 안심하고 활짝 웃었다. 보리가 자신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오랫동안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보리가 깨달음과 평화의 경지에 이륾을 축복했고 보리 엄마가 아픈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기를 빌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우솜돌의 폐종양에 대해 이것저것 정보를 알아보면서 나는 결국 아픈 반려가족과 보호자를 위한 카페에 도착했다. 그곳은 얼핏 도떼기 시장 같았다. 소리는 없었지만 아주 시끌벅적한 느낌이었다. 대문 간판에는 카메라 앵글에 담겨 멋짐을 ‘뿜뿜'하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의 사진 몇 장이 떡 하니 걸려 있고, 약품과 간식 따위를 파는 기업들이 홍보를 위한 임상체험단을 모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질병에 관해 끊임없이 게시판에 질문하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실시간 채팅을 통해 자신들과 함께 사는 반려동물의 증상에 대한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곳은 종양통합방이었다.

 

암은 사람 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에게도 심각한 질병이었다. 종양통합방에서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걸릴 수 있는 온갖 암에 관한 정보가 넘쳐났고 보호자들은 증상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항암이냐 호스피스냐를 두고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데 어쩌지 못해 우왕좌왕하거나 이미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사례들을 읽으며 사례를 올린 보호자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또 주사항암이냐, 먹는 항암약이냐를 두고 의견을 묻고도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민을 한다. 항암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 아이마다 복합적인 질병을 앓고 있어서 질문에 따른 대답이 정답이 될 수도 없다.

 

의료비 내역 또한 공유하고 있어 수술비 내역서 등 영수증을 따로 올리는 방도 있다. 이곳에서도 큰 한숨이 토해져나온다. 솔직히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삼사백 하는 수술 비용이 아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자들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수술’이라 생각한다. 수술을 한 뒤에는 ‘잘 견뎌주어 대견하다', ‘고맙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암에 걸린 아이들은 항암제를 먹어도 대부분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한다. 암을 발견할 즈음이면 병이 어느 정도 진행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개와 고양이들은 체력적으로 인간만큼 강하지 않다. 의료환경 또한 사람들이 다니는 종합병원에 비하면 턱없이 제한적이고 집이 아닌 낯선 환경에서는 스트레스가 심해 증상이 나빠져 어이없게 목숨을 잃는 사례도 눈에 띈다. 


완치 소식은 어린 개들에게서나 그것도 아주 드물게 게시판에 올라온다. 그럴 때면 축하와 부러움이 섞인 댓글들이 모여든다. 보호자들은 머지 않아 아이가 떠날 것을 알면서도 한 줌의 고통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조금만 이상한 증세를 보여도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잠을 못 이룬채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다. 나약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보의 공유 밖에 없었다. 고통받는 아이를 위해, 그저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어 뭐라도 해야만 했기에. 그들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아이의 질병에 관한 논문을 직접 번역하기도 하고 번역한 내용을 공유하면서 그 누군가들의 상담자로써 기능했고 동시에 의뢰인이였다. 하나 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진심어린 격려와 위로를 전달했다. 누군가가 아이의 부음을 올리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슬프고 경건한 마음으로 아이가 평화로운 곳으로 가기를 함께 소망하는 조문객이 된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이들이 단지 개나 고양이를 키우거나 잃었다는 경험만으로 보호자와 함께 울기도 한다. 따라서 추모방은 이 공간의 핵심이었다. 


떠나가는 아이, 떠나간 아이, 떠나서 1년, 2년, 3년..해마다 돌아오는 아이들의 기일과 함께 기억에서 재생되는 시간을 기록하고 싶어하는 이 추모공간에는 항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살았던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낙엽처럼 수북하다. 마치 소중한 추억을 조금씩 잃어버릴까봐 정신을 퍼뜩 차리며 스스로를 향해 '메멘토모리'를 외치는 것만 같다. 사진마다 생전의 모습들이 소환되고, 마치 아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마음 속의 하늘을 상상하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기일이 되면 평소에 즐겨먹던 간식과 사료와 맛난 음식 등을 잔뜩 차려놓은 채 유골함을 안고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궁금해한다. 꿈 속에서라도 찾아와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의 사연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게 된다. 


이들의 간병 생활과 애절함이 담긴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야말로 참으로 냉정하고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믈이, 부니, 귀얄이, 져비, 순돌이, 우솜돌이 떠날 때마다 추모 기도도 하다 말았고 그저 어떤 상념에 사로잡혀 멍하니 있었던 듯 하다. 일찌감치 포기부터 배워 체념이 삶의 습관처럼 자리잡았던 탓일까? ‘다 그런 거지, 뭘.' 허무함이 머릿 속을 지배했다. 그런 나에게 이들의 편지는 각성이란 것을 안겨 주었다. 아이의 영혼이 사랑스러운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염원하는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익명의 누군가들이다. 하지만 그 익명의 누군가들이 사랑했던 개와 고양이들과의 시간은 일생에서 가장 특별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간직한 빛은 작고 희미했지만 그 특별함 때문에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우정의 빛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와 뭔가 달랐다. 반려동물에 대해 편견이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별스러운 집착'으로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빛은 희미하게 빛나면서도 절대 꺼지지 않아 결국에는 이별의 아픔을 견디게 하고 상처난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기도 한다. 또 항암이나 호스피스 중인 아이를 간병하는 보호자라면 내면을 덮쳐오는 좌절과 우울에 맞서 "덤벼, 이 암세포 시끼들!"이라며 투사처럼 싸우게도 한다. 


개나 고양이들을 관찰해보면 바라는 것이 많지 않아 행복을 자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바라는 것은 인간에 비하면 아주 단순한데 먹이와 놀이, 낮잠, 집사의 따사로운 손길이 그들의 일상에서 핵심인 듯 하다. 특히 개들이야말로 기쁨을 자주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다. 그들은 감각이 잘 발달되어 있다. 집사가 아침과 저녁에 보이는 수상하고 익숙한 눈빛만 봐도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좌우로 비틀며 기쁨을 표현한다. 집사의 묘한 눈빛만으로도 산책을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식사 시간에는 우르르 몰려나와 부엌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즐거운 기대감을 표현한다. 풀냄새를 맡으면 흥분해 똥을 누고 넓은 운동장을 인지하면 새총에서 튕겨나간 돌멩이처럼 저 멀리 달아난다. 


나는 언젠가 곧 겨울이 닥쳐왔음에도 털이 다 빠져버리는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강아지를 본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며칠을 굶은 것처럼 보였다. 집주인이 말을 타고 정원 안을 빙빙 도는 큰 주택 앞에서 알짱거리는 모습을 보았던 터라 그가 방치한 개인줄 알고 날 잡아 한 마디 하려던 참이었다. 이 아이는 벌거벗은 작은 몸으로 춥지도 않은지 또 다른 떠돌이로 보이는 검은 개와 자주 어울렸다. 만날 때마다 아이들은 함께 있었고, 햇볕 따뜻한 날에 둘이 노는 모습을 보면 슬랩스틱 코메디언도 웃고 갈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검은 개가 보이지 않았는데, 벌거벗은 아이만이 외롭게 막대기를 물어뜯으며 친구와 함께 놀았던 곳에 주저 앉아 있었다. 서리가 내릴 듯 추운 밤에도 축축한 낙엽 위에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검은 개를 기다리는 것일까? 왜 추위를 피하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차를 몰고 지나치면서도 구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상황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아홉 아이들을 떠올리면 내 마음은 더 가난해졌다. 구조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다음 날 아이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얼어죽어 있었다. 떠돌이 개라는 것을 안 것은 아이가 죽은 이후였지만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방관했던 내 모습에 죄책감이 더해졌지만 죽기 며칠 전을 제외하고 아이는 행복해보였다. 짐작이지만 밥을 얻어먹지도 못했을텐데 말이다. 


통합종양방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떠나가는 아이들보다 보호자들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이들의 신체를 쉬지 않고 돌본 터라 기진맥진도 할 터인데, 아이가 입맛을 잃어 밥을 먹지 않는데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간절하게 묻는 사람들이었다. 혈액 검사 수치를 의사에게 들었음에도 실낱 같은 희망을 찾기 위해 다시 또 검사 결과 자료를 게시판에 올려 사람들과 함께 분석하기도 한다. 죽음이 머지 않은 아이 곁에서 “조금만 버텨줘"를 외치기도 하고 항암보조제를 구해 암세포를 조금이나마 견제하려 노력하며 아이가 식욕촉진제 덕에 밥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순간적으로 안도하다 밥을 먹지 않으면 곧바로 무너진다. 기쁨은 줄어들고 늘어지는 치즈 자락처럼 슬픔만 길어진다. 그래도 또 한 번 해 보자는 심정으로 팔을 걷어부치며 게시판에 질문을 올린다. 종양통합방의 사람들은 지금껏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해줬기 때문에 받은 사랑에 비하면 이 따위 수고는 고통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엄마', '여성'이라는 삼줄보다 더 질긴 마고 할미들을 감지한다. 


고전점성학에서 황도대의 열 두 하우스는 일곱 신(행성)들이 거주하는 상상의 집이다. 그 중 11하우스는 토성이 지배하며 사인은 물병자리다. ‘친구(그룹)의 우정과 선물’, ‘희망', ‘행운'이라는 의미로써 가장 길한 하우스로 꼽힌다.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나타내는 10하우스를 11하우스가 보조하기 때문에 11하우스에 목성처럼 중요한 행성이 있는 사람들은 인맥만으로 사회에서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옛 점성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에 부합하는 해석을 진행하는 것은 나름이니까. 하지만 그들의 '처세적인 설명'은 나에게 의구심으로 다가왔다. 성공을 위한 인맥이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나 평등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물병자리의 특징이 아닌 개인적이고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염소자리의 특성에 가깝지 않은가. 물병자리가 지배하는 타로덱은 17번 별카드이고 목적의식적인 행위를 통한 '정화'나 '승화'가 핵심 키워드라고 본다. 염소자리가 지배하는 타로덱은 15번 악마다. 엄격하고 부지런하며 열심히 일하지만 물질이나 관계, 성공의 욕망을 상징하는 악마와 11번 하우스의 연결은 초보 점성학도인 내가 보기에도 어색해 보였다. 좁은 식견이지만 직업을 주관하는 10하우스 염소자리의 과잉된 에너지를 적절히 흐르게 도와주는 역할이 11하우스 물병자리의 본업(?)이 아닐까 싶다. 


내가 경험한 11하우스는 쉽게 말해 ‘공공성의 기쁨'이었다. 이 공공성의 실행자는 11하우스에 참여한 사람들이었고 궁극적인 목표는 연대와 치유다. 예를 들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단체를 설립하거나 광화문으로 나가 직접 행동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도 11하우스의 성질이며 정치적인 써클 뿐만 아니라 글쓰기나 그림 동호회, 노동조합, 협동조합, 보험, 네이버 지식인, 브런치 심지어는 아름답고 작은 숲공원을 거니는 것마저 11하우스에 해당한다.  순돌이와 아이들이 사고를 치는 동안 영도대교 근처 아스팔트에서 김진숙 동지와 한진조합원들의 자유와 권리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11하우스는 우정과 희망을 품은 공간이었다. 떠난 보리와 보리 엄마의 안녕을 빌며 흘렸던 나의 눈물도 마찬가지다. 11하우스가 전해주는 친구의 선물은 더 나은 세상을 염원하는 정화의 눈물과 카타르시스이며 우리 모두가 보여주는 연대의 힘 쉽게 말하면 '사회적 우정'이라고 나는 정의하고 싶다. 


우솜돌을 위해 내가 머물렀던 그 공간은 실낙원이었고 어찌보면 지옥에 가까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은 유토피아이기도 했다. 누군가 아이를 잃었을 때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각자를 보듬었고 함께 울었다. 우정이라는 감정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협력이 필수였던 원시 사회에서 발달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이라 건조하게 가정할 수 있다 치자. 그러한들  아픔에 공감하는 타인들의 우정이 기다리던 편지처럼 도착할 때 옛 우정을 잃은 누군가의 마음에는 잠시 슬픔이 물러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우솜돌이 떠나자 나는 한동안 그 공간에 가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 달 전에 우연히 메일을 열었을 때 카페에서 보내온 사람들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수술비 영수증을 공유하는 카테고리였는데 ‘혹시 수술 뒤 아이는 잘 지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이가 떠났다고 대답하자 사람들 모두 곧바로 죄송하다며 조심스레 위로의 댓글을 달았다. 그 중 누군가가 말했다.”아이는 떠났지만 보호자님과 행복했을 거에요. 벌써 천국에서 우리 사랑이랑 인사도 나누었다고 합니다. 천국 간 아이들 다시 만나려면 우리부터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해요. 힘냅시다!” 그와 나는 한참동안 웃음 섞인 댓글을 주고 받았다. 과연 천국통신원 사랑이는 우솜돌의 안부를 어떻게 전해줄까? 다음 날부터 카페에 들락거리며 폐종양으로 힘들어하는 아이와 보호자를 위해 나는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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