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양보하고, 먼 훗날로 미뤄둔다.
엄마가 되고 난 후 한 번도 안 깨고 쭉 자 본 일에 손에 꼽힌다. 초등학교 4학년이지만 아직 혼자 잠들지 못하는 둘째 덕에 난 항상 이 방에서 자다가 저 방에서 자다가를 반복하는데 그러다 보니 늘 꿀잠에 대한 욕구가 크다. 덩치는 나만해져서 잠이 들면 턱 하니 내 배 위에 혹은 다리 위에 장딴지를 올려놓는 녀석, 의도치 않았겠으나 자다가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살며시 다리를 내려놓고 나의 편한 잠자리를 찾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부르는 소리에 "어~" 하고 다시 둘째 방으로 직행을 한다. 화장실이 가고 싶지만 혼자 가는 건 무섭다며 부르는 거다. 나 역시 어린 시절 그러했으니 차마 군소리는 하지 못하고 화장실 앞에서 보초를 섰다가 아이 방의 선풍기를 틀고 둘째 옆에 또 구겨져 누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남편의 휴대폰 알람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어제도 이 방에서 저 방을 왔다 갔다 하다가 새벽이 밝았다.
고3 시절엔 쏟아지는 잠이 원망스러워서 졸다가 나도 모르게 화들짝 깨서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후회에 눈물을 흘렸던 적도 많다. 체력이 약하고, 먹는 양도 많지 않은 편이니 잠이라도 보충했어야 했는데 예민한 성격에 그것마저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다 지나 보내고 대학시절엔 학교 방송일을 한답시고, 꼬박 날을 새며 그때 그렇게 소망했던 잠을 하루고, 이틀이고 미뤄두기 일수였다. 좋아하지 않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거라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밤잠을 제대로 못 자도 하룻밤 깊이 자고 일어나면 밤을 새웠던 일 조차 잊을 만큼 에너지가 가득했던 것 같다. 그러던 방송일을 접고, 졸업 후 취업을 하고, 시계처럼 똑딱똑딱 정해진 루틴대로 살다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만났을 땐 정말 고3 때 체력의 한계는 일도 아니었구나 했다. 백일이 될 무렵까지 아이가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에 나도 자다가 놀라서 자는 아이를 보고, 또 보고 했다. 완모를 한 탓에 수시로 잠에서 깬 아이에게 젖을 물리느라 스트레이트 잠은 꿈도 못 꿨다. 밤중 수유를 떼느라 밤중에 젖을 물려달라 우는 아이를 업고 일주일 밤을 지새웠던 일, 자다가 이유 없이 깨서 울어대는 녀석 때문에 혼비백산 놀라던 일, 큰 아이가 좀 더 편해졌다 싶을 무렵 찾아온 둘째 덕에 뱃속의 태동에, 또 반복되는 육아에 그렇게 흘러 흘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꿀잠에 대한 욕구는 더욱더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도 잠자리 독립이 안 됐냐?'
라고 묻고는 한다. 워낙 내성적이라 말을 잘하지 않는 둘째 녀석은 밤에 자려고 나란히 누우면 하루 동안 속상했던 일, 마음에 쌓아뒀던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서 들려준다. 생각해보니 큰 아이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하루 종일 아이 마음을 듬뿍 받아줄 수 있는 시간이 그때인 것 같아서 옆에 누워서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준다. 큰 아이도 잠자리를 독립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자연스럽게 혼자 자겠다고 선택을 했듯이 분명히 둘째도 스스로 잠자리 독립을 선택하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기다려주는 중이다. 모두 엄마니까 가능한 일들이다. 모두 내 아이를 이해하는 엄마가 되니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가끔씩 친정엄마를 보면 어느 날은
"내가 잠 귀신이 붙었나 오늘은 왜 이렇게 머리가 땅에만 닿으면 잠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라며 소파에서, 침대에서 하루 종일 잠을 주무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날씨 탓이라고 말씀드리기도 한다. 비가 오거나 하늘이 우중충한 날이면 아이들도 처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엄마가 그동안 집안일하느라, 회사 일 하느라, 우리 삼 남매 돌보느라 미루고 미뤄뒀던 꿀잠을 조금씩 나눠 자고 있다는 생각을 더러 한다. 고3 시절, 집안일에, 회사 일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서도 우리가 잠들 때까지 잠들지 못하시고 책상 뒤 우리 침대에서, 거실 소파에서 쪽잠을 주무시던 엄마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때는 엄마가 주무시든 안 주무시든 내가 공부하는데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 가서 편하게 주무시라고 해도 알았다는 말씀만 하시지 늘 소파에서, 우리 침대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 하셨다. 그런데 엄마가 되어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 그래서 그때 미뤄뒀던 꿀잠을 몇 년에 걸쳐서 지금까지도 조금씩 나눠서 주무시는게 아닐까?
"엄마, 하루 종일 잠이 쏟아지는 날에는 그냥 자면 되지. 밥을 차려줄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이 많지도 않은데. 엄마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으니 그렇게 잠이 오는 날은 좀 자면 어때. 빨래 하루 미뤘다고, 청소 하루 안 했다고 크게 문제 되지 않으니 그런 날은 푹 주무셔요."
그런데도 엄마는 그런 자신이 뭔가 용납이 되지 않는 눈치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던 우리 엄마는 그래도 되는데... 그때가 되어봐야 아는 일들, 나 역시 그때가 되면 오늘의 엄마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
"엄~마~"
지금 이 시각, 둘째가 또 나를 부른다. 아침이면 일어나면서 늘 엄마를 부르는 녀석.
"응."
하며 아이 침대로 달려가 보니 아직 눈은 뜨지도 않고 두 팔을 벌린다. 이제는 내가 안아주는 게 아니라 녀석에게 안기는 듯하다. 오늘도 모닝 뽀뽀를 잊지 않는다. 자고 일어났는데 기분이 좋은 걸 보니 꿀잠을 잤나 보다. 그래. 너희 나이 때에는 그래야지. 꿀잠을 자고 기분 좋게 일어나야지. 엄마의 꿀잠을 너에게 양보했으니 오늘 하루는 더욱 기분 좋게 보내거라.
엄마는 오늘의 꿀잠을 먼 훗날로 킵 해둘게. 사랑한다.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