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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고 Jan 22. 2018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영화 <러덜리스>

본 글에는 영화 결말이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잘 나가던 광고 기획자이던 샘(빌리 크루덥)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들을 잃는다. 아들을 잃은 것도 믿기지 않는데 자신을 자꾸 쫓아다니는 기자들을 피해 술로 지내던 샘은 결국 보트에 숨어살기 시작한다. 폐인처럼 살던 샘에게 아들 조쉬의 유품이 전달되고, 샘은 아들이 만든 음악을 듣게 된다. 기타를 메고 이름을 바꾼 채 술집에서 아들이 만든 노래를 부르는 샘. 그런 샘의 노래에 빠진 쿠엔틴(안톤 옐친)이 함께 노래를 하자며 샘을 쫓아다니고, 얼떨결에 샘은 아들이 만든 노래로 무대 위에 오르게 된다.


주인공인 샘에게는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있다. 샘은 아들의 죽음으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지만 아들이 만든 노래를 접하고 난 후 조금 달라진다. 아들이 만든 노래를 술집에서 부르게 된 것. 은둔 생활과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서서 노래를 하는 것은 전혀 일관성 있는 행동이 아니다. 아마도 샘은 조쉬가 만든 노래가 너무 좋아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조쉬가 만든 노래들이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나는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어서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샘의 마음은 그랬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샘은 조쉬의 죽음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피해 다니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반전에 대해 말하자면 관객들을 속이기 위한 연출이었다면 몰라도 영화의 도입부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샘이 조쉬에게 수업을 제끼고 만나자고 했지만 조쉬는 그냥 수업에 들어갔고, 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다. 당연히 우리는 조쉬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조쉬는 가해자이다.(어떤 이유로 조쉬가 6명의 학생들을 죽였는지는 나오지 않는 것이 좀 아쉽다.) 어쩌면 가해자를 미화한다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어쨌든 영화 중반까지 샘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기를, 조쉬의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노래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가 되고 샘은 다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기적이지만 아들을 위해 부르고 싶었던 노래는 자신의 아들뻘 되는 쿠엔틴에게 상처를 준다. 샘은 어떻게 해서든 쿠엔틴이 음악을 포기하지 않게 하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조쉬를 정말 마음으로 보내주게 된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고 싶은 것은 조쉬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었다는 것 같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부모님들에게 자식을 빼앗아간 것은 용서받을 수 없지만 샘 역시 아들을 잃은 것은 똑같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잃었는데 아들이 가해자라고 비난이 쏟아지고 기자들이 쫓아다닌다.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그저 아들이 만든 노래를 같이 부르고 싶다. 그게 샘에게 전부다.

영화의 마지막 샘은 조쉬가 마지막으로 만들던 노래를 자신이 가사를 붙여서 부른다. 함께 부르고 싶다고. 그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일 뿐이다. 그의 노래를 아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이 영화에 대해 함부로 말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 영화가 미화가 아니라 용서에 가까워질 수 있는 영화이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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