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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고 Nov 26. 2016

할머니가 보고 싶은 날

2014년 11월 26일


어느 일요일 아침 아빠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집에는 나뿐이었고, 아빠는 핸드폰을 두고 교회에 가신 듯했다.


전화를 받아보니 할머니가 위급하셔서 응급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응급실에서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응급실에서 할머니는 좀 나아지셨고, 그때부터 한 달간 대학병원에 입원해계셨다.


엄마도 아빠도 모든 일을 쉬면서 할머니 병간호에 매달렸다.

엄마가 오전에서 오후까지, 아빠가 밤부터 새벽까지 병실을 지키셨다.

나는 집에서 아빠 점심을 챙겨드리고, 저녁에는 엄마를 마중하러 병원에 갔다.

나도 이제 성인이니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었지만 아빠는 나 혼자 병실에 남는 것을 걱정하셨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힘들다는 걸 아시기에 나를 혼자 병실에 두려 하지 않으셨다.


병실에 누워계신 할머니는 눈을 뜨고 계셨지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래도 오직 예전부터 할머니에게 나에게 자주 하시던 "까꿍~"을 하면 웃어주셨다.

나는 늘 목소리를 높여서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차도는 없고 시간만 가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병원비는 쌓여가는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험이 코앞인데 공부를 할 수도 없었다. 아무런 의지가 없었다.

할머니 앞에서 웃으며 재롱을 부리다가 집에 와서는 캄캄한 방에 혼자 누워 울었다.

무서웠다.


결국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샀던 1층 집에 우리만 이사를 했다.

할머니가 돌아오시면 혼이 날까 봐 할머니 물건을 제대로 버리지 못해 집은 어수선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대학병원 때처럼 자주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아빠를 알아보시고 말씀도 하기 시작했다.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아들, 우리 며느리 하며 엄마 아빠를 찾으셨다.


"인사하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네."


할머니의 회복에 가족들 모두 들떴지만 무언가 불안하기도 했다.

꼭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잠시 힘을 내신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불안한 느낌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하필 며칠 전 주말에만 할머니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누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장례식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손님들을 보며 웃고 심부름을 했다.

그리고 울었다. 끝도 없이 눈물이 났다.

할머니를 보내는 마지막 관에 '죄송해요'라는 말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그토록 바라셨던 취직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도 못했다.

아니, 할머니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라는 말에 귀찮다고 투정을 부렸다.

아니, 조금 더 자주 할머니를 찾아갈 수 있었는데 나는 항상 나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되는 일들만 있었다.


지금이라면

나는 할머니가 바라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고

지금이라면

할머니를 더 자주 만나러 갈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이라면

나는 죄송하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할머니를 볼 수가 없다.


그때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나는 너무나도 잘 지낸다. 할머니를 생각하는 날은 거의 없다. 더 이상 찬송가를 들어도 울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잘 지낼 것이라는 것을 안다.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우리 가족 모두 잘 지낼 것이다.

그건 할머니를 완전히 잊어서가 아니다. 할머니를 믿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어디서든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실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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