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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l 04. 2021

더 가까이

2019.01.03

"우연한 만남"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2017.05.04)


인간은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나지만, 그는 항상 쇠사슬에 속박되어 있다.


홉스, 로크와 함께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로 분류되는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의 탄식이다. 그는 만악의 근원이 사회에 있다고 믿었다. 시기와 질투, 탐욕과 억압 같은 악(惡)은 모두 사회가 형성되면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회가 출현하기 전에 존재했었던 “고결한 자연인”(noble savage)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행복을 느꼈을 것이라고 믿었고, 문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자연적인 상태를 깊이 동경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에서 산업화 시대의 자본주의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마르크스도 노년에는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살았듯이, 루소도 진정한 야인(野人)으로 살지는 않았다.


인간은 서로와의 관계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우선 생물학적으로 그렇다. 사람은 모두 태아일 때부터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된 상태로 자라난다. 정치적으로도 그렇다. 세금은 문명의 비용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정치를 증오하는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안보, 치안, 보건과 같은 공공재를 제공하는 어떤 국가의 통치 아래에서 일생을 영위한다. 경제적으로도 그렇다. 시장경제 체제 아래에서는 개개인이 모두 어떤 제품을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소비를 하는 상호적인 경제활동에 참가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물질적, 정신적 풍요로움이 증가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심리적 측면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설명했고,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물리적 형벌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7세기의 영국 시인 존 던은 "그 누구도 홀로 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고, 시인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가진 독특한 존재로서의 진정한 자아"를 타인에게, 사회에게 온전히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내면에는 고귀한 신념과 아름다운 희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언행, 일상 속에서 머리를 시도 때도 없이 스치는 추잡한 잡념들, 타인에 대한 편견과 시기와 증오와 질투도 분명히 존재한다.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굴라그(Gulag)를 고발한 반체제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관통한다”라고 지적한다.


자신조차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모든 것이 타인에게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다면, 사회는 파멸에 이르고 문명은 결국 붕괴할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끌어안는' 포용을 지향하지 않고 '타인이 동등한 인격체라는 사실은 존중하되 서로를 적당한 거리에 두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관용이라는 타협에 안주하게 된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으로 포용을 받을 수 있을지도 두렵고, 자신에게 타인을 완전히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우리는 적극적인 포용이 아닌 수동적인 관용이라는 암묵적인 타협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기에 성장 배경, 종교, 직종, 문화적 취향, 취미활동, 인종, 국적과 같은 요소들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서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굳이 다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다 설명할 수도 없으니 겉으로 드러나는 기준으로 봤을 때 충분한 교집합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말과 행동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고, 상대방도 동일하게 함으로써 “서로를 적당한 거리에 두는” 관계가 서서히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도 매우 취약하다. 100번을 잘해줘도 한 번의 잘못을 더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더 많이 의지하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더 잘 알아줄 거라고 믿었던 사람일수록 한 번의 실수로 오는 그 실망의 무게는 더 크다.


항시 나를 가장 오해하기 쉬운 존재는 오히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안다는 그 확신에 찬 전제가 늘 속단과 오해를 부른다는 걸 알기에, 나는 누굴 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상대도 그러지 않기를 가까울수록 더 바라고. 그건 내가 복잡하거나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든 몇 마디 말이나 경험으로 판단되고, 규정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이석원, <우리가 보낸 가장  >


관계의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더 굳어지는 관계들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누군가와 더 가까워질수록, 자신에 대해서 알지 않았으면 하는 모든 것조차도 무조건적으로 포용해주기를 원하는 지극히 모순적인 감정이 발생한다.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하기엔
난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것 같네요
허나 아무것도 몰라요 난, 그대라는 사람에 관해
어떡해야 그대에 다다를 수 있는지
험한 파도에 휩쓸리는 배처럼
나는 그대와 멀어져만 가네요
그댄 아나요, 내 고독의 의미를
그대에게 닿지 못하는 오랜 날들을

--- 이적, "고독의 의미"


'서로를 적당한 거리에 두는' 상태는 안정적인 평형 상태가 아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무너졌다가 다시 잠시 생겨나는 불안정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한편으로는 포용의 가능성, 즉 완전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저명한 심리학자와 그들이 진행한 실험을 설명하는 로렌 슬레이터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의 '애착'에 대한 실험을 소개한다. 할로우는 어머니의 부재가 어린 원숭이의 정서적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잔혹한 방법으로 연구했다. 이 실험의 일부로 'Iron Maiden'이라는 인공 장치를 만들어서 어머니를 가장한다. 슬레이터는 실험 중 아기 원숭이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한다.


할로우는 'Iron Maiden'을 다양하게 변형시켰다. 어떤 장치는 몹시 차가운 얼음물을 뿜었고, 또 어떤 장치는 아기 원숭이를 찔렀다. 이처럼 호된 고문에도 아기 원숭이는 계속 달라붙어 있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은 실로 강력하다. 온갖 상처를 입고서도 엉금엉금 돌아온다. 냉랭함을 겪고 나서도 엉뚱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온기를 찾는다. 이러한 행동을 심리학적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촉감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영장류 동물의 어두운 현실이 드러날 뿐이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를 지탱하지만, 우리를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굉장한 믿음을 품고 있다. 그 어떤 역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까지, 나에게서 너에게까지 다리를 꿋꿋하게 짓는다.

더 가까이 오렴, 이라고 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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