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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Aug 07. 2021

5년 동안의 여행

2021.08.02 - 2021.08.05

난 여행가가 될 거야
자유로이 발길이 닿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난 떠날 거야

-- 권진아, “여행가”   


지난 6월 초, 대학원 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거의 일주일이 지났던 때였다. 2016년 가을에 입학할 때부터 많은 도움을 주신 교수님과 도서관 앞 야외 카페에서 뵙기로 했다. 거의 1년 반 만에 직접 인사드리는 자리였다.


그간의 고민을 매듭짓고 결정을 이미 학과에 통보한 후여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부터 격식 없이 친구처럼 대해주신 교수님이었지만 예전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도 들었다.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충분히 쉬고 재충전하는 시간을 꼭 가지라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 여행을 추천해주셨다.


작년 여름, 가족이 여름휴가를 다녀올 장소를 찾다가 다른 주 방문을 가급적 자제하라는 학교 당국의 방역 지침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다고 하셨다. 구체적인 일정을 알려주신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한 마디도 덧붙이셨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여름 일정을 짜다가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실 “캘리포니아 북부”라는 표현을 듣고 의아했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중심지는 LA, 북부 캘리포니아의 중심지는 샌프란시스코로 널리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제 베이 지역에서 지낸 지 5년이 되어가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무엇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나파와 소노마 밸리 정도가 전부였다.


지도를 펼쳐보면 샌프란시스코에 “북부”라는 지리적 표현을 쓰기에는 어색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위도로 보나 캘리포니아 해안선 상의 위치로 보나 오히려 “중부”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직선거리로 따져도 위로는 오레건 주와의 경계 인근의 크레센트 시티까지 500km, 아래로는 멕시코와의 국경 옆의 샌디에이고까지 750km 정도다. 


물론 인구 87만의 샌프란시스코 북쪽으로 큰 도시가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실리콘 밸리의 본거지인 산호세가 인구가 더 많다는 것을 꽤 최근에 알게 됐다.) 주도인 새크라멘토도 인구가 약 50만이고, 시내의 숙소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북부 지역의 주요 도시인 레딩은 1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을 살펴보면 대도시가 들어설 지리적 여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지역 내의 이동이 용이하지 않다. 오레건부터 멕시코까지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산맥이 있는가 하면, 내륙에는 북미 대륙의 주요 산맥에 속하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이 자리 잡고 있다.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형 고속도로는 5번 주간 고속도로 (Interstate Highway 5, I-5) 하나뿐이다. 산맥을 가로질러서 해안가로부터 내륙으로 들어가는 방향으로는 평균 시속 60km를 넘는 도로가 없고, 그마저도 한 손으로 다 셀 수 있는 정도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중심부를 따라 샌프란시스코 만까지 남쪽으로 흐르는 새크라멘토 강 외에는 넓은 강도 없다. 산에서 해안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지형 탓에 인구 3만의 해안 도시인 유레카를 제외하면 항구가 들어설 수 있는 항만도 없다. 


이런 지리적 배경 때문에 경제활동도 영향을 받는다. 19세기에는 모피 무역과 “골드 러시” 덕분에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목재 산업과 관광업에 주로 의존한다고 한다. 이 지역을 운전하다 보면 두꺼운 통나무를 여럿 싣고 가는 트럭을 종종 마주치게 되고, 레딩 주위에는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국립공원이 여럿 있다.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을 다녀오기로 결심하고 주요 관광지, 도로와 도시의 위치를 살펴보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동부의 뉴 잉글랜드를 서부에 심어놓은 듯한 마을”인 멘도시노와 1번 주도를 따라가며 볼 수 있는 해안가 풍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1번 주도와 101번 국도를 거치며 2시간쯤 올라가다 보면 거인들의 길(Avenue of the Giants)로 불리는 254번 주도를 만나게 된다. 높이가 1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삼나무 숲을 지나가는 도로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254번 주도의 북쪽 입구로부터 1시간 거리에는 유레카가 있다. 빅토리아 시대풍의 건물과 나름의 구시가지도 있는 도시지만, 그보다는 세콰이어 공원 동물원(Sequoia Park Zoo)에 삼나무 사이를 걸을 수 있는 스카이워크를 들리기로 마음먹었다. 유레카에서 101번 국도로 올라가면 해안가를 따라 울창한 삼나무 숲을 지나면서 오레건 주에 다다르게 된다. 


내륙에는 미국의 국립공원 제도를 확립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세계의 8번째 불가사의”라고 부른 버니 폭포(Burney Falls), 높이 4,322m에 이르는 섀스타 산(Mount Shasta), 그리고 화산지대에 위치한 라센 화산 국립공원(Lassen Volcanic National Park)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륙으로 들어가자니 산불이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극심한 가뭄과 강한 바람, 높은 기온 때문에 캘리포니아에서 지난 몇 년 동안 큰 규모의 산불이 예년보다 많이 발생해왔다. 작년 9월에는 베이 지역의 하늘이 산불 연기로 뒤덮였고, 최근에는 오레건 주 남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인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대륙을 건너 뉴욕까지 날아가기도 했다. 근처에 산불이 나면 시야도 가리고 숨이 막히는 매캐한 공기도 문제지만, 몇 안 되는 도로가 폐쇄되고 국립공원이 닫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일단 첫날은 멘도시노 근처에서, 둘째 날 밤은 유레카 인근의 숙소에서 보내기로 정하고 호텔을 일찍이 예약했다. 하지만 근처에 큰 산불이 발생한다면 내륙으로 이동할 수가 없기 때문에 출발 며칠 전이 되어서야 레딩에 숙소를 잡았다. 전날 저녁까지도 취소하고 환불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산불 현황을 수시로 확인하며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8월 2일부터 5일까지 나흘 동안 1,900km를 홀로 운전하면서 더 많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옅은 안개가 흩날리는 삼나무 숲을 관통하는 국도의 풍경도,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도로 양 옆으로 지평선까지 펼쳐진 과수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사라질 뻔한 세 번째 날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8월 3일 저녁, 유레카 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포튜나의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바로 상황을 확인했다. 인근에 발생한 작은 규모의 산불 때문에 유레카 지역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36번 주도와 299번 주도 일부 구간이 전날부터 폐쇄되어 있었다. 이 두 길 외에는 산맥을 가로지를 수 있는 대안이 전혀 없다. 당일인 8월 4일 아침에 호텔 로비 탁자에 놓인 지역 신문 1면에 실릴 정도로 심각한 사태였다. 출발 직전에 보니 다행히도 36번과 299번 주도를 잇는 3번 주도를 중간에 갈아타서 레딩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하지만 산불 연기 때문에 계획을 일부 수정해야 했다. 원래는 점심시간쯤에 레딩에 도착한 후 I-5로 올라가서 섀스타 산을 먼저 들리고, 동쪽으로 89번 주도를 거쳐서 버니 폭포를 구경한 후에 시계 방향으로 다시 레딩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전에 섀스타 산 근처의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것을 확인하고 버니 폭포를 먼저 가는 것으로 순서를 바꿨다. 오후에 대기질이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풍향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뿌연 연기에 가려진 산의 모습을 기억 속에 담고 싶지는 않았다.


자욱한 연기와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만들어낸 지구 종말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섬뜩한 풍경을 3시간 동안 지나며 레딩에 도착하니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쉬어가면서 차가운 라떼로 목을 축여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둘러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고 한 시간 남짓 달려서 버니 폭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폭포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고,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세계의 8번째 불가사의"라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표현이 절로 이해가 갔다. 폭포수가 힘차게 떨어지며 흐르는 계곡의 바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원했다. 주변이 사막은 아니었지만 오아시스를 찾은 느낌이었다.



계곡을 따라 걸으며 폭포를 마음껏 감상한 후에 89번 주도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만년설이 조금 남은 섀스타 산의 동쪽 면이 지평선을 넘어서 서서히 드러났다. 원래의 계획대로 동쪽 방향으로 운전했다면 보지 못했을 웅장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굽이진 길을 한참 올라가서 섀스타 산 중턱에 차를 세우고 보니 산불 연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셔터 소리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한 청년이 멀찍이 앉아서 이따금씩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다가 다시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저 심심해서 그 먼 길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 무엇을 떠나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다시 내려가야 하는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리 절경이라도 영원히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조금은 더 봐야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들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차문을 열고 앉아 벨트를 채우고 시동을 걸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은 그 자리에 조금은 더 오래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여행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기 위해서, 환상적인 날씨와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서 여유가 있을 때 가끔씩 집을 떠나서 지내기도 한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캘리포니아 북쪽으로 갈 계획을 세우면서, 그리고 나흘 동안 운전을 하면서 어떤 대단한 목적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들리기 어려울 것 같은 장소를 여유가 있을 때 둘러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 때가 다가오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그 먼 길을 달려온 건 아니었을까. 항상 편안하고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대학원 생활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걸까.


아직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두려워서 도망치듯 북쪽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지난 5년의 시간을 조금은 더 온전하게, 더 고스란히 떠나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비행기를 타고 싶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창문 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기차를 타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 오른발로 페달을 밟으면서 속도를 정확히 확인하고 싶었다. 다가오는 커브를 대비하며 손가락 하나 하나로 핸들을 잡고 힘차게 돌리면서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어디를 지나가는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두 눈으로 보면서 움직이고 싶었다. 내 손으로 가고, 내 손으로 다시 오고 싶었다.


길 위에서 보낸 나흘 동안 대학원에서 쌓아온 기억들이 가지런히 정리가 되었는지, 제 갈 곳을 찾았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여행을 하면서 생긴 빨래 더미는 아직도 그대로 있고, 이달 말까지 이사할 집도 찾아야 한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말하듯, 아무리 꿈과 같은 휴양지에 가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든 잠시 지나가면 여행이고, 적당히 오래 머물면 집이 되는 걸까. 실은 새로운 곳에 도착하고, 머물고, 다시 다른 곳을 향해 떠나는 모든 과정은 여행이다. 이곳에서 5년 동안 조금은 긴 여행을 한 셈이다. 계획하고 예상했던 일도 있었지만, 상상하지도 못핬던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뜻깊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그 여행의 끝에 다다른 것만큼은 확실하다. 후회도, 미련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도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움츠러들고 싶지는 않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앞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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