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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Aug 27. 2021

이사

2021.08.27

2016.09.02


방을 비웠다.


5일의 시간을 이렇게 다섯 글자짜리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니 조금은 당황스럽다.


주말에 날을 잡을 수 있으면 짐을 옮길 때 주변의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 주말에는 요세미티 단체 여행, 다음 주말에는 LA에서의 친구 결혼식 일정이 잡혀버렸다. 그리고 게으른 탓에 짐을 한꺼번에 미리 챙겨놓지 못했다. 마침 옮길 집도 운전해서 5분 거리에 있고, 급한 일도 없는 터라 짐을 혼자서 옮기기로 결정했다. 테이프가 필요 없는 접이식 박스와 한국을 오가면서 모은 짐가방들을 동원해서 짐을 조금씩 옮겼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이다. 1인실에서 혼자 지냈지만 그동안 잡동사니가 꽤 많이 모였다. 대책 없이 충동구매한 책은 물론,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줄넘기와 냉동실에 산더미처럼 쌓인 떡국 떡도 있었다. 이사는 물건에 대한 과감한 선택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안고 갈 수는 없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물건을 새 집으로 고스란히 옮겼지만, 평상시에 비하면 꽤 많은 것을 버렸다.


책장, 책상, 욕실, 옷장, 부엌, 냉장고 순서로 방을 비웠다. 물건을 손수 담고, 옮기고, 꺼내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에서 보낸 지난 5년의 시간을 떠나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순식간에'만'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다. 이사를 할 때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고 지루한 시간들을 거쳐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갑작스러운 결정도 실은 오랜 시간 동안 어디론가 향하던 많은 발걸음의 당연한 종착지일 수도 있다.


원래 계획했던 학위를 마치지 않고 학교를 떠나기로 했을 때, 주변에서는 큰 결정을 내렸다며 위로와 격려를 건네주었다. 이미 기억이 미화된 것일까. 그 당시에는 전혀 큰 결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상황이 닥쳤을 때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적어도 2년의 시간 동안 이미 그 모든 고민을 끝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할 때, 누군가가 앞길을 가로막고 면전에 거울을 비춰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5년을 지낸 방을 비우고 보니 예전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포스터를 떼면서 떨어진 페인트 자국, 조금은 어두워진 카펫과 구석에 내려앉은 약간의 먼지를 제외하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기본적인 가구가 제공되고, 여러 학생이 거쳐가는 기숙사의 특성상 놀랄 일은 아니다. 그래도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 부질없는 욕심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칠 줄 모르는 함박눈에 서서히 사라지는 자신의 발자국이 아쉬워서 같은 자리를 서성이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집은 옮기게 되었지만 1년 동안은 같은 동네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완전히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기치 못한 ‘탈선’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인연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과분한 행운이다. 그동안 곁을 지켜준 모든 사람과 앞으로도 어울리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득 궁금해진다.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무엇이 쌓인 걸까. 그 모든 것을 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일단 급한 대로 이사는 했지만, 이제는 옮긴 짐을 정리해야 한다. 버릴 것을 마저 버리고, 그 후에도 남겨진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으려면 시간이 조금은 더 걸릴 것이다.


아마도 5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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