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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Dec 27. 2021

3박 4일

2021.12.26

눈으로 뒤덮인 브라이스 캐년 (2021.12.26)

여행은  “지금이 아니면    같다라는 생각으로 떠나는  같다.


2013년 여름 동안 스톡홀름에서 지내면서 홀로 주말마다 헬싱키, 오슬로, 베르겐, 코펜하겐, 탈린을 비롯해서 북유럽 구경을 나섰을 때 그 생각을 처음 했었던 것 같다.


그때의 경험 덕분일까. 혼자서 새로운 곳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풍경 사진과 매우 어색한 셀카만 남는다는 것이 늘 문제지만, 그 외에는 모든 방면에서 편하다. 일정이 빠듯하면 점심을 늦게 먹거나 간식으로 간단하게 해치울 수도 있고, 다음날 일정을 전날 저녁에 수정해도 아무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가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떠나려 하는 것은 /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다.” 박노해 시인의 “빛의 통로를 따라서”의 일부다. 함께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도 있지만, 혼자만 할 수 있는 여행도 분명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할 기회와 시기는 무한하지 않다.


이번 여행도 비슷한 생각으로 떠나게 되었다. 한 달쯤 전, 자다 깨서 비몽사몽 중에 그랜드 캐년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의식 속의 어딘가에서 툭 튀어 오른 것 같다.


얼핏 보니 운전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1박 2일로 다녀올 거리는 아니었다. 적어도 하루는 가면서 보내고, 하루는 오면서 보내야 하니 현실적으로 최소 3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는 김에 근처에 다른 국립공원도 있으니 3박 4일 일정으로 다녀오기로 정했다. 5일로 잡자니 숙박비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또 휴가도 내기 쉽지 않았다. 원래는 12월 27일부터 30일까지 다녀오기로 했다가, 28일에 다른 일정이 생기고 성탄절 연휴를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24-27일 사이에 다녀오기로 막판에 계획을 수정했다.


여행을 갈 때마다 계획을 미리 세우는 편이다. 그렇지만 아주 세부적인 부분까지 사전에 확정 짓지는 않으려고 한다. 어떤 곳을 어떤 순서로 들릴지, 각 장소마다 예약은 필요한지, 그리고 그 사이의 이동 수단과 방법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도만 미리 파악하는 정도다.


계획은 늘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매우 정교한 시간표를 만드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계획을 한 행복도, 예상치 못한 일에 느끼는 행복도 모두 동일한 행복이다.


이미 사흘 동안  1,400마일을 운전했다. 세도나,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 홀스슈 벤드,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에 들렸다. 욕심을 내서 어떻게든 일정을 끼워 맞춰서 자이언 국립공원도 가려다가 결국 체력과 시간의 한계로 전날 저녁에 포기하게 되었다.  사이에 유타 남서부에 예보된 폭설 때문에 브라이스 캐년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닫힐 수도 있어서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어려움 없이 들릴  있었다.


각 장소를 들릴 때마다 느꼈던 소감을 기록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여행은 다른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The journey is the destination,”  “여정 자체가  목적지다라는 진부하게 느껴지는 말의 의미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  같다. 운전 시간이 다른 여행에 비해서 유독 길었고, 오늘 오전에 지나온 89 도로를 포함해서 몇몇 구간은 운전하면서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워서 특히 그랬던  같다.


여행을   보통 이동 수단, 그리고 이동하는 과정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파리를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 샹젤리제 거리 대신 샤를 드골 공항을 고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시간과 과정도 여전히 여행의 일부다.  시간에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고, 복잡하게 얽혀있던 생각들을 내려놓고 차분히 바라볼 수도 있고, 같이 가는 여행에서는 친구랑 소소하거나  깊은 대화를 나눌  있는 시간들이다.


이렇듯 우리는 졸업, 취직, 결혼처럼 삶의 큰 이정표에만 집중하고, 그 목표에 다다르는 모든 과정은 그저 “지나가는 일”쯤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절대적인 비중만 봐도 그 지나가는 시간이 살아있는 시간의 대부분이다. 누구나 일상은 바쁘고 정신없지만, 그 시간을 그저 속절없이 흘러가게만 두고 싶지는 않다.


이제 자고 일어나면 700마일을 달려서 집으로 가게 된다. 이미 3일을 연달아서 장거리 운전을 하니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돌아가는 길의 풍경도 기억 속에 온전히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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