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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8. 2021

500분

학부 수업 조교를 하면서 (2018.11.03)


정치학과 학부 수업 조교를 하는 것이 이번 학기로 3번째다. 매 학기가 10주고 조교가 가르치는 수업이 매주 50분이니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500분이다. 자고 일어나면 지나갈 만큼 짧은 시간이다. 대부분의 학생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 500분이 전부다. 학기를 시작하며 처음 만나고, 학기가 끝나고 최종 성적이 입력되면 다시는 마주치기 어려운 친구들이다.


수업을 준비하고, 과제를 채점하고, 이메일로 오는 질문들에 답하다 보면 자신이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감정노동을 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 학기 중간쯤에 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익명으로 각 조교를 평가할 기회를 주고, 그 평가에 포함된 여러 의견을 반영해서 학기 후반의 수업을 계획하게 된다. 많은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과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학문이고, 교육도 근본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특정한 수업을 수강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전공 필수 과목이어서, 학기 6주째 강의의 주제에만 관심이 있어서, 교수가 유명해서, 혹은 친구나 선후배의 추천 때문에 수업을 듣기도 할 것이다. 학기 초에 자기소개를 하며 물어보기도 하지만, 500분은 각 학생의 관심사와 성장 배경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학생이 많을수록 더욱 그렇다. 이번 학기도 그렇고, 조교를 했던 지난 두 학기에도 분명히 가족에서 처음 대학을 오거나 사회적 취약계층에 속한 학생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조교에게 확실한 것은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그 시간 동안 학생들을 책임지고 강의에서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들을 최대한 함께 풀어줘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 친구들한테 전달할 지식이 있다”는 자신감으로 둔갑한 교만함은 조교를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진다. 기초적인 개념과 이론들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학생의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서 버벅거리고, 미리 준비한 파워포인트 뒤에만 숨어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학생들이 “조교”라는 지위만으로 암묵적으로 부여하는 권위가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말과 글로 설명하려는 내용이 학생에게 과연 얼마나 전달이 되는지, 설명을 잘못해서 필요치 않은 오해를 만드는 건 아닌지 종종 고민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없는 욕심이 있다. 수업을 들은 이유와 무관하게 학생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사람을 이해하는 시각을 조금이라도 다양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학부 때 들었던 여러 수업의 교수와 조교가 나에게 그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특정한 정파의 견해나 가치를 학생에게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상을 정의하고 분석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학생에게 전달하고, 규범적, 도의적 판단은 학생 개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자유를 강압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계적인 중립도 적절하지 않다. 2016년 이후에 비전공 학생들도 정치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핵심적인 가치에는 타협하지 않되, 그 외의 모든 것에는 관용으로 자유를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수업의 내용도 잘 이해하면 좋겠지만, 함께하는 500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세상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라는 막연한 느낌을 한 명에게라도 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수업을 들은 학생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바로 그런 희망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사회가 조교를 포함한 모든 교사에게 부여하는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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