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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Feb 24. 2023

준비

2023.02.23

워싱턴 시내 (2023.02.15)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장관으로 잘 알려진 로버트 맥나마라의 삶을 조명하는 에롤 모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Fog of War>에 등장하는 일화다.


2차 대전 당시 작전 통계 분석 장교로 복무한 맥나마라는 종전 후에 포드 자동차 회사에 입사한다. 그는 매사에 정확한 데이터를 철저하게 수집해서 문제를 해결하며 탁월한 경영 실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이내 회장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불과 5주 만에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존 F. 케네디의 보좌진으로부터 입각 제안을 받은 것이다. 맥나마라가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지만, 그래도 케네디를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는 설득을 결국 이기지 못한다.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그는 케네디에게 말한다. “제가 임명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누가 봐도 전 자격이 없습니다."


이에 케네디가 답했다고 한다. “이보게. 대통령이 되기 전에 다닐 수 있는 학교는 있던가?”


케네디는 맥나마라를 국방장관에 임명한다는 발표문을 그 자리에서 손수 작성하고, 바로 밖으로 나가서 기자들 앞에 맥나마라와 나란히 서서 임명 소식을 발표한다.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한 지 불과 반년만에 예기치 못한 일련의 변화로 인해 업무 부담이 늘었다. 미국 서부에서 원격으로 근무하다가 2달간 한국에 들어가서 지내고 있었는데, 인수인계도 대부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진행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 보낸 5년 동안 무뎌진 업무 습관을 서서히 되찾으려던 희망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예전에는 실수를 해도 단체의 운영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이른 시점에 책임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비록 비교적 한가한 여름 중이었지만, 대표님이 작년에 잠시 휴가를 떠나시기 전에 “You’re in charge now!”라고 쓰신 이메일을 읽으면서 느낀 공포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에 상황을 들은 한 선배가 건네준 위로가 기억에 남는다. 당장은 알 수 없지만, 훗날 되돌아보면 지금처럼 빨리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우고 성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나중에 다가올 무언가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준비되는 과정일 거라고.


익숙함과 편안함을 추구하고,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머물려고 하는 관성의 위력은 블랙홀처럼 강력하다. 내적 의지와 결단만으로 그 관성을 깨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갈수록 많이 느낀다. 외적 상황의 변화가 없이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상치 못하고 원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일들을 성장의 기회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능력과 성과와 무관하게 자신을 믿고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던가. 실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가 주어져야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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