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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9. 2021

타율

2021.03.23


수업 시간에 아재개그를 시도 때도 없이 투척하는 한 학원 선생님이 있었다. 제설 작업에 염화칼슘을 쓰는 이유인 “어는점 내림” 현상에 대해서 배우기 전에도 이미 수업 도중에 교실이 갑작스럽게 서늘해지는 당황스러운 사태가 종종 발생했다.


하루는 선생님이 수업 중에 작은 뜬금포를 쏘아 올리셨다.


“잘 치는 야구 선수의 타율이 얼마인지 알아?”


꽤 오랫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아마 0.3 정도 되지 않았었나. 중학교 때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김병현 선수의 경기를 나름 꾸준히 챙겨봤던 적이 있어서 그 수치가 어렴풋이 떠올랐던 것 같다.


“개그도 마찬가지다. 10번 중에 3번을 성공하면 훌륭한 거야.”


아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적의 논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묘하게 설득되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적어도 3번 중에 1번을 키득거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 선생님은 이미 존경받아 마땅한 최상위급의 개그맨이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귀인을 앞에 모시고 감사해하지 못할 망정, 조롱과 한없는 멸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내 선생님은 씩 웃으시면서 학생들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포문을 여셨다. 열 중에 일곱은 호응이 없어도 전혀 굴하지 않겠다고 방금 선언하지 않으셨던가.




지금 되돌아보면 타자보다는 무언가를 던지는 투수로 비유하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꾸밈없는 묵직한 직구로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는 한편, 화려한 변화구로 입담을 자랑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따지면서 주위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면 안 그래도 고독한 인생은 배로 고달파진다. 역시 침묵은 금이다.


열 중에 셋. 사실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썩 나쁘지는 않은 기준이다. 이 비유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면 스스로도 언젠가는 필요하게 될 순간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내심 생각했던 것 같다.


시도하지 않은 자유투는 하나도 성공시킬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 그렇지만 체면을 위해서는 배트를 가만히 들고 있는 게 차라리 안전할 수도 있다. 매번 전심전력을 다 해서 헛스윙을 하면 제아무리 이수근이라도 슬랩스틱으로 소생시키기는 어렵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냉정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으면서 충전한 기력을 연거푸 낭비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글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면 바쁜 하루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꼼꼼하게 읽어주신 후에 “공감이 된다”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네주는 분들이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분들이 잘 읽었다며 오랜만에 연락을 남기기도 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말씀해주실 때도 있다.


글을 공유하면서 오히려 받는 것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열 중에 셋은 차치하고 열 중에 하나, 백 중에 하나만이라도 이럴 수 있다면 진심으로 감사할 일이다.


주제를 구상하고 여러 기억들을 더듬어보면서, 문장을 쓰고 지우면서 문득 두려워질 때가 있다. “나만 이런 건 아닐까.” 타인의 생각은 알 길이 없으니, 누군가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혹시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닌지, 너무 난해한 표현을 쓴 것은 아닌지, 터무니없는 이야기나 해석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서 작은 용기를 내어 “거기 누구 없나요”라고 외쳤을 때, “저도 여기 있어요”라는 뚜렷한 메아리가 들려오는 순간의 감동은 표현하기 어렵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보다 더 힘이 되는 진심의 한 마디가 있을까.


시인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말한다. 오늘도 소중한 사람들과 그 섬에서 만나서 잠깐이라도 서로 안부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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