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5
초등학교 2학년쯤의 일로 기억한다.
친구 집에 여럿이서 놀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일정이 있었는지 친구는 급히 어디론가 향했고, 다른 친구들이랑 우산 하나 없이 아파트 동 입구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비는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늦는다고 부모님께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래도 5분이면 뛰어갈 수 있는 거리여서 비를 맞고 갔다. 결국 비를 흠뻑 맞은 채로 현관에 들어왔고, 감기가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사건의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아마 적잖이 왜곡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는 왜 집에 있었을 다른 우산들을 빌려주지 않고 어딘가로 홀로 사라졌는지 원망하며 느꼈던 치기 어린 배신감은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있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기억들을 보면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실은 내면 어딘가에 깊이 잠복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도 그러니 더 최근의 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몇 년마다 한 번씩은 다시 찾아보는 <이터널 선샤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는지는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